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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의 빛 샘플

*SZ* 2017. 1. 2. 15:18



1월 8일 대운동회 [F01] 부스에서 나올 청황 신간 샘플입니다.




*키세의 가족과 과거에 대한 날조설정이 있습니다.

*키세가 농구 안 하고 모델길만 걸었습니다.

*농구선수 은퇴 후 모델을 시작한 아오미네 x 중학생 때부터 모델을 시작한 키세

*모델활동에 대한 묘사는 매우 적으며 업계에 대한 설명은 모조리 허구입니다.

*퇴고 전 샘플입니다. 






<엄마랑 료타는 인어공주처럼 깊은 바닷속에 있는 거야.>


어렸을 적,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간 어머니가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주시고 언제나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먼저 잠들어버린 누나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에 키세는 겁을 먹고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럼 아빠랑 누나들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으면 어머니는 살며시 물기 어린 키세의 눈을 손으로 덮어 감겨주었다.


<아빠랑 누나들은 바깥에 있어. 그러니까 가까이 가려고 하면, 료타도 인어공주처럼 마녀의 저주를 받고 물거품이 되어버릴 거야.>


가까이 가면 안 돼. 알았지? 속삭이는 어머니의 말투는 무서우면서도 서글퍼서 키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다른 동화를 읽어주고 나서는 누나와 키세 모두에게 말을 걸어주던 어머니였지만 인어공주를 읽어주었을 때는 키세에게만, 저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해주곤 했다.


<료타는 아빠랑 누나랑도 같이 있고 싶은데 물거품 되는 건 싫어.>

<그럼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환히 빛나야지, 빛나지 못하면 료타도 물거품이 돼서 검은 마녀에게 잡아먹힐 거야.>


어머니는 젖살이 오른 키세의 볼에 긴 키스를 남겨주고 방을 나섰다. 키세는 어둠만 남은 방 안에서 조용히 숨을 삼켰다.

어두운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호흡을 죽였다. 어린 키세는 그렇게 가라앉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까마득한 바다의 저 깊숙한 곳으로.

그 밑바닥엔 이미 붉은 물거품이 된 제 어미가 있었다.










“푸하!”


한참을 묶여있던 숨이 물방울과 함께 격하게 터져 나왔다. 구석에 무드 등만 켜져 있어 은은하게 어두운 욕실은 키세가 물에 잠기기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었다. 키세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물의 온도만 조금 미지근하게 식었을 뿐이었다.

키세는 물에 젖은 채 눈앞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긴 뒤 천천히 욕조에 등을 기댔다. 일반적으로 나오는 욕조보다 더 깊게 주문 제작한 욕조는 키세가 꼿꼿하게 몸을 세워 앉아도 그의 턱밑까지 물이 찼다.

물에 젖은 얼굴을 다시 한 번 손으로 쓸어낸 키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욕조에 기어들어오기 전 무언가로 꽉 막힌 것 같았던 호흡은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고통도 물에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물론 이번엔 그렇게 괴로워지기 전에 미리 들어온 거긴 하지만.


그런 여유가 있었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숨을 쉬기 위해 필사적이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저 아래 묻어놓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디밀었다. 물거품처럼 자연스럽게 제 인생에서 씻겨 내려간 어머니에 대한 기억.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나 즐거운 기억보다는 어쩐지 께름칙한 기억이 더 많아 당연하게 저 밑바닥으로 밀어놓은 기억이었다.


“기분 나쁘게.”


키세는 질척하게 달라붙는 기분 나쁨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함께 물속에서 끌려 나온 흰 셔츠가 무겁게 몸에 달라붙었다. 키세는 제 기분을 털어내는 것처럼 거칠게 옷을 벗었다. 호흡은 돌아왔지만 기분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키세는 평소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다.

욕실에 틀어박히기 전에는 나지 않았던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와우, 오늘은 빠르네?”

“내가 맨날 늦는 것처럼 말하지 마요.”

“아니, 너 맨날 늦었어.”


거실에 앉아 키세가 준비를 끝마치기 기다리고 있던 카가미가 못마땅함이 담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키세는 그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그대로 보고 지나쳐 냉장고로 향했다. 카가미가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소리도 그대로 무시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영양 젤리를 꺼내들었다. 바쁜 현대인을 위한 한 끼 대용식으로 나온 제품이지만 키세에게는 대용식이 아니라 주식이었다.


“왜, 또! 오늘은 시간 많으니까 조금은 먹고 가도 되잖아.”

“입맛 없어요.”

“그러지 말고, 조금만.”


카가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키세 입에 물린 젤리를 낚아챘다. 키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카가미를 쏘아보았지만 카가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교환을 이미 수도 없이 해오면서 끔찍이도 익숙해진 시선일 터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릴 정도로. 키세는 이번엔 자신이 먼저 굽혀주기로 했다. 며칠 동안 먼저 물러났던 탓인지 오늘은 물러나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버티고 선 카가미를 꺾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던 탓이 컸다.

키세는 결국 카가미가 키세의 몫으로 조금씩 덜어놓은 접시에서 계란 샌드위치 한 조각을 들었다.


“이것만 먹을 거예요. 더 이상 뭐라 하지 마요.”

“그렇지만…!”

“그럼 그거 돌려주든가.”


키세는 카가미 손에 들린 젤리를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카가미는 황급히 젤리를 뒤로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키세는 작게 코웃음을 흘리며 긴 테이블 한쪽 모서리에 자리를 잡았다. 소리를 작게 줄인 채 틀어진 TV에서는 지난 달 자신이 섰던 유명 디자이너의 런웨이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디자이너도 같이 섰던 모델들도 모두 대단할 거 없었는데 이상하게 호평이었던 행사였다. 뭐 덕분에 그 쇼의 메인으로 섰던 키세의 주가가 상승했으니 키세의 기분이 어떻든 회사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쇼임에 틀림없었다.


이번에 들어온 프로젝트도 저 쇼를 본 상대방 측에서 키세를 지명해 진행하는, 나름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오늘은 그 프로젝트 시동의 첫 미팅날이었다. 키세는 까끌하게 느껴지는 샌드위치를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고는 카가미가 미리 준비해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느긋하게 물에 잠겼다 나왔는데도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혔다. 아무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버린 것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다시 물에 들어갈 시간이 되지 않으니, 얼른 빛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자신이 제대로 호흡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또 다른 장소가 그 빛 속에 있었으니까.


베이비 페이스의 천사, 매혹적인 파인더의 지배자, 런웨이 위에서 빛나는 노란 신성. 이 외에도 언론에서 키세를 칭하는 낯간지러운 수식어는 태산만큼 있었다.

중학교 시절, 독자모델로 조용히 잡지에 데뷔했던 키세는 순식간에 넓은 연령층의 여성들을 사로잡으며 화려하게 피어났다. 키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인기였다. 무료한 시간에 변화를 줄 약간의 스파이스로 생각하고 있던 모델일이 이렇게 자신의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다니.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키세는 저도 모르게 작은 조소를 흘리곤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키세는 어렸을 적부터 끊임없이 제가 빛날 수 있는, 저를 빛나게 할 수 있는 장소를 갈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자기가 스스로 빛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잘게 부서져 사라졌을 때부터 그랬다.


잘한다고 칭찬 받던 큰 누나의 춤사위를 처음 보자마자 더 능숙하게 따라하고 난 이후. 놀라움으로 물들었던 다른 이들의 표정이 경악과 두려움과 분노로 바뀌었을 때. 어린 키세는 그 표정을 보고 제가 스스로 빛날 수 없는 존재라 깨달았다.

그래서 저를 향해 터지는 플래시의 빛과 강하게 내리쬐는 조명의 빛을 온몸으로 받을 때마다 키세는 제 갈증이 채워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물속에 깊이 잠겨 저 바닥에 가라앉은 호흡을 찾아 올라올 때와는 다른 느낌의 안정이었다.

답지 않게 스스로를 되짚어 가며 얼굴을 찌푸리던 키세는 미팅 장소가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갑작스럽게 현실을 마주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아직도 그 소리야?”


뒷좌석에 앉아 중얼거리는 키세의 목소리를 용케 들었는지 말없이 운전을 하고 있던 카가미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키세는 프로젝트 참여가 확정되고 자신과 함께 할 인물이 누구인지 전해 듣고 나서는 일관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이 바닥에 빠삭한 만큼 일 관계자들에게는 생글생글 잘만 웃어보였지만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만 있는 자리에서는 바로 표정을 구겨댔다. 그런 키세의 불만을 제일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들어 넘긴 사람이 바로 매니저인 카가미였다.

키세와 나이가 같아 서로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거고, 무엇보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지 않는 키세에게 밥을 잘 챙겨줄 거란 이유를 들어 반 강제적으로 키세의 매니저가 된 카가미는 자신이 매니저인지 키세의 보모인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키세가 밥이라도 잘 먹으면 그나마 보람은 있을 텐데…. 편식이 심한 어린 아이에게 피망과 당근만 먹이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카가미는 밥문제로 키세와 실랑이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싹싹하고 밝은, 건강함이 샘솟는 싱그러운 미남. 대중들에게 팔리는 키세의 이런 보편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평상시의 그는 매우 염세적이고 불만이 많은, 시니컬한 사람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할 거 같은 이미지와 다르게 헐렁하면서 제멋대로였고, 잘난 외모로 여러 사람을 만나러 다닐 거란 선입견이 무색하게 시간이 날 때면 집에 콕 틀어박혀만 있었다.

독자 모델로 활동하던 시기의 키세를 아는 몇몇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어렸을 땐 이렇게까지 홀로 지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대체 언제 무슨 이유로 이렇게 된 걸까. 카가미는 부드럽게 차를 주차하며 그런 의문을 곱씹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미팅 시간까지 아직 넉넉하게 남아있어서인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소금간만 한 주먹밥을 꺼내 먹기 시작한 카가미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매만지고 있는 키세에게 때늦은 질문을 던졌다. 키세는 눈동자만 굴려 카가미를 보더니 다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등을 기댔다.


“내가 여기서 불만 다 얘기하면 프로젝트 얘기 없던 걸로 해줄 거예요?”

“그건 내 관할이 아닌걸.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었어도 이번엔 무리지만.”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말 안 할래요.”

“아니 무슨 불만인 줄 알아야 그걸 조정해볼 거 아냐.”

“나한테 의견 묻지도 않고 이런 일 덥석 잡은 거부터가 불만인데 뭘 조정해요. 없던 얘기로 할 수도 없다며.”


그 말에 카가미가 주먹밥으로 양 볼이 가득 찬 얼굴을 깊게 찌푸렸다. 분명, 강하게 한 소리를 해야 할 타이밍인데 입을 열 수가 없어 그러는 것이리라. 키세는 그의 심중을 읽어내고는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요, 이미 여기까지 온 거 어설프게 하지는 않을 거니까. 평소 일을 대하는 키세의 자세가 어떤지 잘 아는 카가미는 그 말에 차마 잔소리를 늘어놓지 못하고 작게, 부탁할게, 라는 말만 전했다.

키세는 주먹밥을 다 먹은 카가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못이기는 척 그 뒤를 따라 내렸다.

카가미에게 한 말 중 반은 사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프로젝트를 없던 일로 해달라는 것이 전자,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은 점이 불만이라는 게 후자였다. 일을 통보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준 적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거니와 회사의 이익이 될 만한 커다란 프로젝트는 거의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키세 스스로가 자신의 모델적인 가치에 높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만큼 사무소에서도 그만큼의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한창 주가를 올리기 시작한 키세의 이름에 흠이 가기는커녕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일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을 계속 되풀이하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은 나아지질 않았다. 분명 제 안에 자리한 이 불쾌감이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상대에 대한 불만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에 대해서는 나이, 이름, 이 프로젝트 전에 했던 일에 대한 아주 간략한 이력 정도만 들었다. 따로 키세가 찾아본 건 방금 전 차안에서 찾아본 은퇴에 관한 기사뿐이었다.

천재적인 농구선수, 일본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NBA까지 진출해 크게 이름을 날렸던 스타.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돌연 은퇴 선언. 농구의 신이 사랑한 남자, 아오미네 다이키.


자신을 꾸미던 수식어만큼이나 거창한 단어들의 나열이 꽤나 여럿 보여서 그에 관한 기사는 그 이상 찾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매우 한정적으로 찾아본 자료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 남자가 정말 순수하게 농구에만 매진했다는 점이었다. 유명한 선수라면 분명 스포츠 브랜드에서 한번쯤은 광고 러브콜을 보낼 만도 한데 아오미네는 광고를 찍었다는 말도, 신제품의 모델이 되었다는 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아오미네 다이키는 모델로서는 초보자였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자면 생 초짜였다. 키세는 모델로서 카메라 앞에 한 번도 서본 적이 없는 사람과 지금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판이다. 키세는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고는 불쑥, 카가미에게 물었다.


“이번 일, 스포츠웨어가 메인이에요?”

“무슨 소리야. 전에 얘기해 줬잖아. 정장이라고. 아마 여러 콘셉트로 진행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야. 정장 브랜드니까.”

“흐음, 근데 왜 운동선수 따위를 불러요?”


이해할 수가 없네. 키세는 조소를 담은 표정으로 카가미를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카가미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키세를 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물을 꺼내주었다. 물맛에 유독 까다로운 키세를 위해 따로 준비해 가지고 다니는 미네랄워터였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왜요. 저쪽이 메인인데 내가 입 잘못 놀려서 짤릴까봐?”

“그게 아니라, 키세….”

“결국은 그거잖아요. 운동선수가 그럴 듯한 그림을 낼 수 있게 옆에서 잡아줄 보조자가 필요했던 거 아냐? 나이도 같겠다, 요즘 좀 잘나가겠다, 적당히 내 팬들 관심도 끌 수 있을 거고…. 내 무대 봤다 어쩐다 하지만 그냥 저 이유 때문에 나 고른 거 아녜요?”

“너, 사실은 그게 불만이었던 거지?”


예리한 눈빛으로 탐색하듯 저를 보는 카가미를 마주하고서도 키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그냥 궁금했을 뿐인데.”


그러면서, 작은 거짓을 입에 담았다.

카가미는 키세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니라고 하는 사람에게 더 캐묻기도 뭐했는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팅 시간이 다가와 다른 사람들도 바쁘게 주변을 오가고 있으니 이 이상 키세를 자극해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키세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백기를 들고 한발 물러난 카가미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걱정 마요. 모델 후배들 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친절하게 대할 테니까.”


제발 좀 그래주라. 반쯤 애원하는 듯한 카가미의 목소리에서 깊은 체념의 향이 느껴졌다.



*****



“음, 아까 전에 그렇게 말했지만 역시 안 되겠네요. 친절하게 대하겠다는 말 취소.”


다른 이들의 난처함이 깔린 공간 안에, 싸늘함을 담은 키세의 목소리가 내리 꽂혔다. 키세 옆에서 뭐 마려운 호랑이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카가미가 일어나려는 키세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키세, 그러지 말고 좀만 더…….”

“나 기다려줄 만큼 기다렸고, 참을 만큼 참은 거 같은데요? 연락은?”

“죄, 죄송합니다! 지금, 거의 다 왔다고….”

“30분 전에도 그러지 않았나요? 어디 뭐 외국에서 와요? 이미 일본에 들어와 있다며? 지금 농구 시합으로 따지면 쉬는 시간 다 포함해도 시합 하나 통으로 날린 거 아녜요?”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키세는 계속 요란한 사과만 해대는 남자를 보다가 머리를 짚었다. 카가미를 교묘하게 놀려먹으면서 기분을 푼 게 다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첫 미팅부터 지각이라니 미친 거 아냐? 키세는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카가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가미가 자동 반사처럼 물병을 건넸다.

키세가 흔드는 대로 병 안에서 출렁이는 물결처럼 키세와 마주 앉아 있는 브랜드 디자이너, 사쿠라이 료의 눈동자도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의 잘못도 아닌데 꼭 아오미네의 지각이 자신의 탓인 것처럼 몸을 사리는 디자이너를 보며 키세는 적당히 냉기가 가신 물을 홀짝였다.


1시간 30분. 처음 만나는 자리인 만큼 길게 보며 서로 익숙해지고 당사자들에게 더 구체적인 진행방향을 설명하기로 한 미팅 장소에, 저 시간이 지나도록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총 책임자가 아오미네를 맡아 데려오기로 했는데 아오미네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프로젝트 책임자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완전히, 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은밀하게 진행되는 프로젝트여서 언론의 눈을 피해 최소한의 인원으로 진행된다고 들었다. 그것을 위한 물밑 작업의 한 종류인가? 아님 편하게 하자는 의미의 몰래 카메라? 어느 쪽이든 이유도 모르게 긴 시간 기다리고 있는 키세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종류이긴 매한가지였다.

키세는 물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괜히 카가미가 땀을 흘렸다.


“키세, 그렇게 안달내지 말고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면….”

“모델이고 운동선수이고를 떠나서, 기본적인 약속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그런 친절을 베풀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아니, 너도 그렇게 시간 잘 지키는 건 아니……. 미, 미안.”


그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키세의 지각 역사를 조심스럽게 꺼내보려던 카가미는 빈 물병을 거칠게 구겨버리는 키세의 행동에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키세는 의식적으로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기껏 끌어올린 호흡이 찰나의 실수로 다시 바닥 깊숙이 가라앉을 것 같은 감각이 키세를 휩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오래 물에 있다가 나오는 건데. 매우 늦은 후회를 하던 키세는 문 너머에서 들리는 다급한 발소리에 눈을 떴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달콤해지는 목소리의 여성이 문을 열자마자 머리를 숙였다. 그 가까이에 있던 사쿠라이가 벌떡 일어나 마찬가지로 죄송하다며 90도로 몸을 굽혔다. 키세는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며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숨은 제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참, 그렇게 서두를 거 없다니까 그러네. 시합이랑 달리 내가 안 가면 시작도 못하는 거. 아, 테츠도 포함인가?”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오미네 군!”


높은 여성의 목소리 뒤로 나른함이 담뿍 담긴,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키세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어딘가 많이 굶주린 야생짐승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이 그 공간 안에 모습을 나타냈다. 크고 단단하면서도 매끈하게 균형 잡힌 몸매의 남자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검은 피부가 그의 존재감을 더더욱 강하게 드러냈다.

작게 하품을 하며 분홍 머리 여성 가까이에 선 남자, 아오미네 다이키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는 인물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저 사람인가? 나랑 같이 한다는 그 모델이.”

“잠깐, 아오미네 군! 늦은 거에 대한 사과부터 해야지!”


여성이 다급하게 아오미네의 팔을 붙잡았지만 아오미네는 끄덕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키세 앞에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한층 더 맹수 같았다. 키세는 저를 탐색하는 것 같은 시선을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아오미네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키세는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척 휙, 손을 내밀었다.


“아오미네 다이키 군이죠? 나는….”

“흐음, 뭔가 생각한 거랑 많이 다른데……뭐 여자애들이 꺅꺅댈 만큼 반반하긴 하네.”

“…네?”

“우와, 사츠키, 얘 손목 봐. 건들면 부러지겠네. 모델은 다 이래? 이 손목으론 농구공도 제대로 못 튀길 거 같은데!”


잠시 싸늘한 바람이 그 장소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차가운 정적이 잠재운 공간을 사츠키라 불린 여성의 목소리가 강하게 두드렸다. 아오미네 군! 커다란 외침과 함께 철썩, 하고 그녀의 매끈한 손이 듣기만 해도 등이 짜릿짜릿해지는 소리를 냈다. 아오미네는 강하게 맞은 등을 움츠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왜!”

“내가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한 말은 이렇게 예의 없이 굴라는 말이 아니야!”


키세는 손을 내민 자세로 굳어 있다가 서늘하게 웃으며 카가미를 돌아보았다.


“나, 갈래요.”

“죄송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키세 씨가 꼭 필요하거든요.”

“으악!”


아무도 없던 제 오른편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키세가 작게 소리를 지르며 반걸음 물러났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투명한 존재감을 지닌 남자가 말간 눈동자로 곧게 키세를 응시하고 있었다. 키세는 그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존재인지 아닌지 애매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제 뒤에 있는 카가미를 돌아보았다. 카가미는 그 답지 않게 찌푸린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너였구나, 쿠로코.”

“오랜만입니다, 카가미 군.”

“아는 사이?”

“응, 고등학교 동창이야.”

“같은 농구부 출신이기도 하죠.”


농구, 키세는 그동안 자신과 조금 멀리 있던 단어, 그렇지만 요 며칠 조금 자주 본 그 단어를 속으로 되뇌다가 아직도 사츠키라는 여성에게 붙들려 있는 아오미네를 가리켰다.


“그럼 저 사람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


왜 나한테 저 사람이 저렇다는 걸 전혀 말해주지 않았어요? 눈부시게 빛나는, 키세의 조각 같은 미소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깨달은 카가미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이 프로젝트 자체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해서….”

“덕분에 방금 완전히 마음이 떴는데요.”


키세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었다. 일을 하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막말과 모욕과 비웃음은 편히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질투해 그런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무시까지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 만큼, 키세는 성격이 좋지 않았다. 키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돌려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됐으니까 없던 일로 해요. 다 내 책임으로 해도 상관없으니까.”

“키세!”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안 됩니다. 대신, 키세 씨가 분이 풀릴 때까지 제가 아오미네 군을 두들겨 패드리죠.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순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과격한 단어를 쓰는 쿠로코를 보고 키세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이 프로젝트가 뭐길래 자신을 잡지 못해 이리 안달인 걸까, 하는 호기심도 조금 솟았다.

평소 스케줄에 잡힌 일의 세부사항을 전해주는 카가미가 간단하게 전해준 뒤로, 오늘까지 이 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은데다가 키세 본인도 상대가 모델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그리 강한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어차피 구체적인 사항은 오늘 다 얘기할 거라 들었기 때문에 키세는 이 프로젝트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저런 무시를 받고 그대로 가버리면 뭔가 도망가는 느낌도 날 테고, 자신이 없으면 곤란하다 할 정도이니 현장에서 자신의 요구도 꽤 많은 부분 수용되지 않을까. 키세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런 계산을 하며 입술을 축였다. 그러면서 쿠로코라 불린 남자가 입에 담았던 말 중 제일 구미가 당기는 문장을 되짚었다.


“대신해줄 필요 없어요.”

“네?”

“내가 하게 해줘요. 내가 당사자인데 왜 당신이 패요. 안 그래?”


키세는 샐쭉 웃었다. 쿠로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키세를 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그래도 얼굴은 피해서 부탁드립니다.”

“그 정도 생각은 있어요.”


키세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키세는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혼내주겠다는 말이 저의 기분을 풀기 위한 사탕발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때리겠다고 하면 크게 당황할 거라 여겼는데 쿠로코는 도리어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표정으로 시원스레 키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인상도 희미하고 유약해 보이는 외형이라 소심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매우 대범한 정신의 소유자 같았다.

쿠로코는 표정이 아주 조금 나아진 키세를 살피며 조심스레 제 명함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 「HIKARI」의 총괄책임자 겸 진행을 맡은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키세 료타. 잘 부탁해요.”

“저도 소개가 늦었네요, 죄송해요. 아오미네 다이키의 매니저 모모이 사츠키입니다. 아까는 정말, 죄송합니다.”


키세는 빠르게 쿠로코 옆에 와 꾸벅 고개를 숙이는 모모이를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오미네는 저 멀리에서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만 벅벅 긁어대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모모이에게 들볶인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많은 이런 장소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저런 남자에게 쓴 소리를 퍼부어댈 수 있다니, 어떤 의미론 대단하네. 키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왜 매니저분이 대신 사과하세요? 잘못한 인간은 어디가고.”

“아, 아오미네 군!”


모모이가 얼른 와서 사과하라는 뉘앙스로 아오미네를 불렀다. 아오미네는 정말 마지못해 라는 느낌이 절절 흐르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아, 하고 망설임이 가득한 음색을 길게 뽑아내던 아오미네는 불량스러운 자세로 고개를 까딱 숙였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화 푸쇼.”

“아, 네.”

“오, 생긴 거랑 달리 시원시원, 억!”


키세의 반응에 바로 얼굴에 미소를 띤 아오미네가 키세의 어깨를 두드리려는 것처럼 팔을 뻗다가 그대로 배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뒤에서 오들오들 떨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쿠라이만 히익, 놀란 비명을 지르곤 허공에 연신 사과를 해댔다.

정작 모모이와 쿠로코는 자업자득이라는 표정으로, 주저앉아 허리를 펴지 못하는 아오미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세는 생각보다 깨끗하게 들어간 제 주먹을 살살 흔들었다.


“건들면 부러질 거 같은 손목에 당한 기분이 어때요? 이제 늦은 것도 좀 사과할 마음이 드셨나?”


일부러 도발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하자 아오미네가 아픔을 참는 얼굴로 키세를 올려다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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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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