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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의 농구] 黛福
마유즈미 치히로 x 후쿠이 켄스케
*날조 多, 캐붕 多, 오타&비문 多 개연성 無
*지각해버렸지만 5월 5일 먹복데이 기념 연성입니다.
마유즈미랑 후쿠이랑 썸이라고 보기 힘든 썸을 타다가 갑작스럽게 들러붙습니다.
개연성이라곤 전혀 없고 제 염원만 있습니다....
마유즈미랑 후쿠이랑 사랑을 했으면!!!!!!!!!!
제3자 캐릭터 모브가 다수 출몰 주의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던 날이었다. 길게 주어진 휴일이지만 후쿠이와 다르게 모두 각기 다른 일이 들어차 있던 모양이다.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후배들은 이 긴 연휴동안 도쿄학교와 줄줄이 연습시합이 잡혀 있다고 하니 길게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워하는 후배들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 후쿠이는 아르바이트 시간이 가까워온 오카무라도 마저 배웅하고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자신도 오카무라처럼 아르바이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연휴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후쿠이였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의 옆집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강제 유급휴가를 얻게 되었다. 정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 긴 휴가를 조금 더 일찍 알게 되었다면 나름 알차게 약속을 잡거나 했을 텐데.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집에 일찍 돌아가서 과제를 하거나 공부를 할까, 그것도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며 발길 닿는 대로 걷던 후쿠이는 한적한 길거리에서 옅은 회색빛의 고양이를 마주했다. 고양이는 후쿠이를 경계하는 것처럼 멈춰 서, 푸른 눈동자로 그의 모습을 주욱 훑어보다가 종종 걸음으로 골목을 돌아갔다.
평소였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만, 말했다시피 후쿠이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주어진 긴 짬을 주체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목적 없이 걷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그 고양이가 가는 길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는 작은 의문과 목표가 생긴 것은 절대 뜬금없는 일이 아니다.
긴 시간 신어 잘 길이든 스니커즈가 가볍게 바닥을 찼다. 고양이처럼 날렵한 걸음으로 골목골목, 회색 고양이의 자취를 따라가던 후쿠이는 회색 고양이의 친구 고양이들도 만나고 한적한 공원에 제일 볕이 잘 드는 장소도 알아냈다. 그 골목에서 제일 처음 장미꽃이 핀 집도 보았고, 자신이 지내는 아파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피아노를 잘 치는 누군가가 산다는 것도 알았다.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저녁 해와 정말 잘 어울리는 그 피아노곡에 정신이 팔린 듯 멈춰선 후쿠이를 부르는 것처럼 모퉁이에 멈춰선 고양이가 길게 울었다. 후쿠이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회색 고양이가 왜 따라오지 않냐는 것처럼 고개를 돌린 채 후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오라고?”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처럼 고양이가 작게 울더니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쿠이는 즐겁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회색 고양이와 함께 했던 작은 모험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이런 곳에 음식점이 다 있네?”
후쿠이는 고양이가 당당하게 들어간, 작고 허름한 음식점 앞에 서서 잔뜩 낡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이에 더 기울어진 해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간판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안이 잘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유리문에 우동과 정식, 단 두 단어만 쓰여 있었다. 후쿠이는 그 작은 고양이가 안에서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낡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주방과 맞닿아 있는 바(Bar)형태의 일인용 좌석이 대여섯, 둘이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좌석이 셋. 마침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테이블좌석 하나만 빼고 모조리 손님이 들어차 있었다.
음식점 특유의 왁자한 소음 사이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계산대 안쪽에 마련된 작은 사발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가 집이었구나. 땀으로 범벅인 직원이 당연하다는 느낌으로 그 사발에 사료를 채우는 것을 보고 후쿠이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인연이겠다, 저 녀석 따라다니느라 배도 좀 고프겠다, 저녁은 여기서 먹을까. 그렇게 생각한 후쿠이는 유일하게 비어있는 좌석에 털썩 앉았다. 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후쿠이에게 다가왔다.
“합석이신데 괜찮으시겠어요?”
“합석이요?”
비어있는 자리인데 대체 무슨 소리지? 후쿠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맞은편을 보았다가, 앉을 때까지만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깨닫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데 어째, 맞은편에 앉은 상대의 못마땅한 표정이 매우 낯이 익었다. 후쿠이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테이블에 반쯤 엎어졌다.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라고, 마유즈미.”
“말했어. 두 번이나.”
“아, 그래?”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후쿠이를 보고 마유즈미는 질린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쿠이는 그 모습을 본척만척하며 식탁 위에 있는 작은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우와, 정말 정식이랑 우동밖에 없네. 그것도 각각 한 종류로만.”
“불만이면 다른 데 가든가.”
“내가 언제 불만이래?”
후쿠이는 피식 웃으며 다시 글자가 그리 많지 않은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보아도 식사로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오늘의 정식과 오늘의 우동 단 두 개 뿐, 나머지는 맥주 한 잔에 안주로 걸맞은 소소한 안주류뿐이었다.
점원의 설명으로는 그날 그날, 재료 수급 상황에 따라 아니 정확히는 재료를 사오는 사장님의 기분에 따라 곁들여지는 음식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어째 선택지는 적은데 그만큼 고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응?”
그런 후쿠이를 두고 있기 거북했는지 마유즈미가 입을 열었다.
“정식도 괜찮지만 우동이 더 맛있어.”
“그, 그래? 고마워.”
그러고 보면, 마유즈미가 먹고 있는 것도 우동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면발 사이로 커다란 유부가 보이는 것을 보면 오늘의 우동은 키츠네 우동인 모양이다. 마유즈미는 그 간략한 메뉴 추천을 끝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메뉴가 두 가지뿐이어서인지 주문한 음식은 거의 바로 나왔다. 후쿠이는 말간 국물부터 한 모금 마시고는 배시시 웃었다. 뜨끈한 우동 국물은 확실히 그 어떤 가게에서 먹었던 것보다 진하고 맛있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맛이랄까. 오카무라도 좋아하겠네. 쫄깃한 면발을 씹어 삼키며 작게 중얼거리자 건너편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후쿠이는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마유즈미는 동그랗게 뜬 후쿠이의 눈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후식으로 나온 떡을 한입 베어 물었다.
“왜 그래?”
“아니, 별로.”
“별로인 사람의 얼굴이 아닌데. 뭔가 불만이 있으면 확실히 말해.”
마유즈미는 내가 언제 불만이라고……까지 말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매우 낯익은 그 문장에 잠시 멈칫한 후쿠이는 그게 바로 조금 전 자신이 발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끅끅 웃어댔다. 마유즈미가 약간 험악한 분위기를 띄운 채 남은 떡을 마저 씹어대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한번 터진 웃음을 진정시키긴 무척이나 어려웠다.
마유즈미가 떡을 다 씹어 삼킬 때쯤에야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후쿠이는 달달한 유부를 크게 한 입 베어물고 젓가락을 내저었다.
“알았어. 네가 좋아하는 이 가게, 소문 안 낼게.”
“……뭐?”
단계를 매우 건너뛴 후쿠이의 말에 마유즈미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세이린의 그 쿠로코 테츠야와 매우 비슷한 느낌이지만 확실히 쿠로코보다는 표정이나 감정의 표현이 조금 더 다채롭고 직관적인 느낌이었다. 특히 기분 나쁜 감정이 말이지. 후쿠이는, 서로 알기는 하지만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마유즈미에 대한 정보를 새로이 입력해가며 우동을 후루룩 빨아올렸다.
자신이 한 말에 놀랐지만 그 후 그 말에 대한 반박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이 가게를 소문내 손님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맞기는 했나보다. 하긴, 손님이 많아져서 자리가 순식간에 꽉 차면, 이 맛있는 우동도 느긋하게 못 먹을 테니까.
지금도 단골로 보이는 손님들만으로도 꽉 찼는데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늘어나게 되면 줄을 서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 재료소진으로 영업이 종료돼 허탕을 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후쿠이는 메뉴 아래쪽에 주의사항 표식을 달고 적혀 있는. 재료 소진 시 영업 종료. 라는 문구를 재차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면이라서 그런지 꽤 커다란 그릇에 담겨 나왔던 우동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후쿠이는 자꾸 먹고 싶어지는 유부를 조금조금 아껴 먹으며,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후식 떡을 마유즈미의 쟁반에 옮겨놓았다. 날이 날이어서 그런지 떡으로 준비한 모양이다.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괜히 젓가락으로 빈 그릇을 휘저으며 국물만 마시고 있던 마유즈미가 얼굴을 슬쩍 찌푸리며 그 떡과 후쿠이를 번갈아 보았다.
“뭐야?”
“아니, 메뉴 추천해준 거도 고맙고, 기다려주기까지 하니까 그 사례?”
“아니, 내가 언제 기다렸다고…….”
“지금. 그렇잖아?”
후쿠이는 이제 국물도 거의 사라진 마유즈미의 그릇을 젓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얼마 남지 않은 유부를 쏠랑 입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유즈미와 후쿠이의 고개가 동시에 옆으로 돌아갔다.
후쿠이를 이 가게로 안내한 회색 고양이가 둘의 시선을 받고 다시 짧게 울더니 후쿠이의 다리 사이로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일인용 좌석에 앉아 반주를 걸치고 있던 지긋한 나이의 회사원 둘이 그 고양이의 모습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타마도 암컷이었어. 너도 우리 같은 늙은 아저씨들보다 젊고 잘생긴 오빠가 좋다는 거지?”
“낯 엄청 가리는 녀석인데 용케 길들였구먼.”
“아, 아니 제가 뭘 어떻게 한 게 아니라…….”
후쿠이는 갑작스럽게 수많은 시선을 받아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진땀을 흘렸다. 바쁘게 손님들 사이를 오가던 점원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타마쨩, 너 그렇게 쉬운 고양이 아니었잖아, 나랑 친해지는 데에 6개월이나 걸렸으면서! 타마라 불린 회색 고양이는 후쿠이의 다리에 반쯤 몸을 숨긴 채 점원의 말을 못들은 척 길게 하품을 했다. 점원은 그런 고양이의 반응이 이미 익숙한 듯 크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엄청 도도한 공주님인가보네.”
후쿠이는 제 다리에 기대어 앉은 고양이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시원한 보리차를 마셨다. 마유즈미도, 다른 손님들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놀란 얼굴로 후쿠이와 고양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걔가 그렇게 누구한테 친한 척 하는 거 처음 봤어.”
“그, 그래?”
“고양이들에게만 통하는 페로몬 갖고 있는 거 아냐?”
“뭐야, 그게.”
후쿠이가 어이없다는 투로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발밑에서 고롱대고 있던 타마는 어느새 날렵한 몸놀림으로 올라와 후쿠이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점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황급히 다가왔다. 으앗, 이 녀석. 손님 옷 더러워지게 뭐하는 거야! 후쿠이는 억지로 고양이를 안아 내리려는 점원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잠시만 놀아주다가 갈게요.”
후쿠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휙, 마유즈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유즈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좀 더 떠들다 가자. 뭔가 마실래? 맥주나 소주……아, 우리 아직 술은 안 되는구나. 음료수는…아 메론소다 있네! 이거 마시자. 새우튀김도 시켜서. 내가 쏠게. 이후에 뭔가 일 있어? 시간 괜찮지?”
“……시간이 괜찮은지를 먼저 물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괜찮아, 안 괜찮아?”
“…전, 메론소다 말고 칼피스소다로 주세요.”
마유즈미는 저를 보는 후쿠이의 시선을 못 본 채 하며 점원에게 말했다. 점원은 차마 크게 웃지 못하고 미소만 지은 채 메뉴를 적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후쿠이는 그런 마유즈미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타마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유즈미는 그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 고양이 같다는 말 자주 듣지?”
“응? 갑자기 그건 왜?”
“제멋대로인 게 꼭 네 무릎에 앉은 그 녀석 같아서.”
마유즈미는 고갯짓으로 타마를 가리켰다. 마유즈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타마가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흘리며 마유즈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후쿠이는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소리는 한번도……아니, 고등학생 때 들었었나……? 으음, 잘 모르겠다.”
후쿠이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치?”
마지막은 꼭 고양이에게 묻는 것처럼 타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한 후쿠이의 모습을 보며 마유즈미는 또 다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직후 노릇하게 잘 튀겨진 새우튀김과 음료가 도착했다.
점원은 새우튀김을 노리려는 것처럼 펄쩍 뛰어오른 타마를 능숙하게 낚아채 안고는 고개를 숙였다.
“새우튀김은 사장님이 주시는 서비스예요. 앞으로 자주 오셔서 타마랑 놀아주세요.”
점원이 고개를 돌린 쪽에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하는 주방장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이 가게의 사장인 모양이다. 후쿠이는 허겁지겁 마주 목례를 했다. 갑자기 매우 황송한 심정이 됐다. 그런 후쿠이를 보고 피식 웃은 마유즈미가 후쿠이보다 먼저 새우튀김을 집어 아삭 씹어먹었다.
“이 가게의 공주님을 잘 꼬신 후쿠이 님 덕분에 잘 얻어먹네.”
“누가 누굴 꼬셨다고.”
후쿠이는 그렇게 말하며 메론소다를 한번에 쭉 빨아 마시다가 뭔가 생각난 듯 큭큭 웃으며 턱을 괬다.
“그러는 너는, 고양이 닮았다는 말 못 들어봤어? 내가 보기엔 나보다 네가 더 닮은 거 같은데.”
“뭔 소리야.”
“색이나 이미지로 보면 타마랑 너랑 같은 계통 같은데?”
마유즈미는 뭔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꾹 다물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칼피스소다만 들이키던 마유즈미는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후쿠이의 주변을 맴도는 타마의 모습을 흘겨보며 뱉어내듯 중얼거렸다.
“난 고양이 별로 안 좋아해.”
“아, 나 이거 알아. 동족혐오야.”
“……야.”
후쿠이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단둘이 있어도 그리 어색한 느낌은 아니었다. 가끔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 부분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뭐, 그런 부분이야 앞으로 알아 가면 되겠지. 얼떨결에 둘만의 비밀 장소도 생겼고, 기적의 세대들이 있던 학교의 졸업생들끼리는 나름의 연락망도 구축되어 있으니 생각보다는 자주 만나 수 있을 것이리라.
후쿠이는 타마와 마유즈미의 의미 모를 눈싸움을 흐뭇하게 감상하며, 달달한 메론소다를 마셨다.
* * *
생각보다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 이상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그 우동을 함께 먹었던 ‘타마야’나 농구와 관련된 장소 이외의 곳에서.
후쿠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은 채 필사적으로 제 시선을 피하는 마유즈미를 올려다보며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오락실도 오는구나, 너.”
“……내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고. 그러는 너야말로.”
“아니, 난 지나가다가 여기 있는 크레인 기계에…….”
“기계에?”
“아아! 아무렴 어때! 나도 뭐 못 올 곳에 왔냐?”
“왜 흥분하고 그래?”
마유즈미는 어느새 머쓱한 표정을 지우고 피식 웃었다. 후쿠이는 왠지 진 기분이 들어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 내밀다가 마유즈미가 앞에 두고 있는 기계를 보았다.
“너도 이거 하던 중이야?”
“……너도?”
“아….”
후쿠이가 실언했다는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마유즈미가 앞에 두고 있는 기계에는 고양이 관련 굿즈가 쌓여있었다.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스낵부터 시작해서 봉제인형, 그리고 그 고양이의 디자인을 적절하게 사용한 미소녀 피규어까지. 물론 그 피규어는 직접 뽑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고양이 관련 스낵을 몇 개 이상 뽑았을 때 주는 경품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뭔가 이 고양이 캐릭터랑 무슨 사과 어쩌구 하는 라이트노벨이랑 콜라보 했다고 했었지. 그 라이트노벨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A부터 D까지 다른 디자인으로 각양각색의 매력을 뽐내고 있는 미소녀 피규어가 그 라이트노벨에 등장하는 캐릭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낸 후쿠이는 자신을 바라본 채 멀뚱히 서 있는 마유즈미의 손에 들린 책의 표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사과 어쩌구다.”
“시계장치의 사과와 벌꿀과 여동생.”
“엑……? 뭐라고?”
“사과 어쩌구가 아니라 시계장치의 사과와 벌꿀과 여동생 이라고. 책 제목.”
“음……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겠다. 일단 여동생이 나오는 내용인가 보네.”
마유즈미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쿠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이다가 작게 탄성을 지으며 크레인 기계 안쪽을 가리켰다.
“마유즈미가 노리는 건 저 애들 중 하나?”
“C상의 카구야.”
“우와, 고양이버전 마이우봉 300개나 뽑아야 되네.”
“지금 180개 정도 뽑았어.”
마유즈미가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에 후쿠이가 기겁을 하고 놀랐다. 180개?! 재차 묻는 말에 마유즈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후쿠이 쪽에선 잘 보이지 않는 크레인 기계 반대편을 가리켰다. 커다란 종이 쇼핑백에 마이우봉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는 너는, 누구 노리는데. 카구야땅은 아니겠지?”
“카, 카구야땅……? 아니, 나는 그냥 마이우봉만 있으면 되는데.”
“뭐?”
“크레인 경품으로만 있는 한정이니까, 아츠시 좀 주려고.”
마유즈미는 아츠시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뒤늦게 그가 무라사키바라를 지칭한다는 것을 깨닫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내가 뽑은 거 줄게.”
“어, 정말?!”
“싫으면 말고.”
“아니야! 고마워, 마유즈미! 아, 아니다 다 받는 건 조금 미안하니까. 나도 어느 정도 뽑을래. 나도 남한테 받은 걸로 선물해서 생색내기는 싫거든.”
그렇게 의기투합을 하게 된 두 사람은 그 크레인 기계의 마이우봉을 다 털어버리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자리를 떴다. 마유즈미의 코치 덕분에 생각보다 돈을 덜 쓰고 목적한 만큼의 마이우봉을 뽑은 후쿠이가 답례로 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그늘에 자리한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마유즈미는 경품으로 받은 피규어를 이리저리 돌려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후쿠이는 그럼 마유즈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었던 탓이다.
어쩔 수 없이 마유즈미가 옆에 내려놓은 라이트노벨을 들어 후루룩 훑어보던 후쿠이는 책과 피규어를 번갈아 보다가 작게 소리를 냈다. 아쉬움과 깨달음이 적절하게 섞인 음성이었다.
그 소리에 마유즈미가, 어쩐지 행복한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마치 왜, 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아 후쿠이는 책을 내려놓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니…보니까 걔 원래 토끼 귀 캐릭터인 거 같은데 고양이 귀보다 토끼 귀가 더 귀여운 거 같아서……아니 물론 고양이 귀 단 것도 귀여운데…!”
좋아하는 캐릭터인 거 같은데 잘못 말했다간 괜히 기분 상하지 않을까 싶어 어떻게든 사족을 덧붙이는 후쿠이의 말을 듣고 마유즈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그렇지?”
뭐, 네코미미도 나쁘진 않지만. 같은 고양이 귀를 말하는데 왜 마유즈미가 말하는 고양이 귀는 자신이 말하는 것과 다른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마유즈미의 기분이 상한 게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후쿠이는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녹아내리기 시작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나서도 둘은 한동안 벤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후쿠이였지만 가끔은 이렇게 태평하게 있는 것도 좋았다.
옆에 있는 마유즈미가 이 여유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는 느낌이어서 그런지 왠지 자기까지 그 영향을 받은 기분이었다.
후쿠이는 마이우봉에 그려진 고양이캐릭터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마유즈미가 소중히 옆에 두고 있는 카구야땅 피규어도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작게 웃었다.
“역시 고양이귀는 그림이라 캐릭터가 하는 게 귀엽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카구야 피규어 감상 타임이 끝나고 나서부터는 여태 후쿠이가 어떤 소리를 해도 잠자코 듣고만 있거나 응, 흐응, 그런가? 정도의 대꾸만 하던 마유즈미가 처음으로 시선을 돌려 반응다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후쿠이는 피규어 상자 겉면에 프린트된 피규어 사진 중, 고양이 귀 부분을 손으로 콕콕 두드리면서 웃었다.
“아니 올해 2월, 졸업하기 전에…다같이 고양이귀 쓰고 사진 찍은 적이 있거든? 냥냥데이라고 혹시 알아? 2월 22일…….”
“당연하지.”
“다, 당연한 거였어? 난 히무로가 알아 와서 처음 알았는데…아, 아무튼 그래서 어쩌다보니 우리가 은퇴하기 전, 스타팅 멤버들이랑 고양이귀 하고 사진 찍자는 흐름이 됐단 말이야.”
후쿠이는 벌써부터 무엇이 그리 웃긴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후쿠이가 은퇴하기 전, 그때 요센의 스타팅멤버가 어땠는지 잘 기억하고 있는 마유즈미는 후쿠이가 왜 벌써부터 저렇게 웃겨 죽어가려는지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짠, 고양이 귀를 한 고릴라.”
예상도 하고 상상도 하고 있었지만 막상 보게 된 사진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하고 엄청나서 마유즈미는 자기도 모르게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체구와 척 보기에도 고릴라를 떠올리게 하는 외형으로 다소곳하게 고양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카무라의 모습을 보고 마유즈미는 잠시 숨도 쉬지 못했다. 다른 의미로 숨 막히는 자태였다.
그런 마유즈미의 모습을 보고 후쿠이가 다시금 배를 잡고 웃었다. 역시나 생각보다 표정이 다양한 놈이다. 말로는 하지 않지만 표정에서 못마땅함이 가득 묻어나는 마유즈미의 모습에 후쿠이는 끅끅 웃음을 삼키며 다음 사진을 보여주었다.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 담긴 류와 히무로가 검은 고양이귀를 쓰고 있었다. 후쿠이는 히무로의 독사진도 몇 장 넘겨 보여주고는 작게 웃었다.
“아, 얼굴이 반반하게 받쳐주면 확실히 약간 캐릭터 보는 느낌이긴 하네.”
위화감이 그리 느껴지지 않는 히무로의 사진이 확실히 조금 많다는 것을 느끼고 후쿠이는 재빨리 사진을 넘겼다. 마유즈미는 흐응, 심드렁한 투로 숨을 내쉬고는 후쿠이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핸드폰을 받아갔다.
“네 후배들은 고양이라기보다는, 흑표범이나 재규어 같은 느낌인데?”
“엑, 그래? 그치만 아츠시는 좀 귀엽지 않아?”
이지스의 방패로 통하던 요센의 커다란 선수들 사이에서도 제일 크던 후배의 사진을 보여주며 후쿠이는 흐뭇하게 웃었다. 과자로 꼬셔냈는지 품안에 과자를 한가득 안고, 겨우겨우 고양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무라사키바라의 사진을 보고 마유즈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무심하게 사진을 넘겼다. 후쿠이가 잔뜩 당황한 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지만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지 마유즈미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후쿠이의 손을 피해 휴대전화를 높이 들어올렸다.
“역시 고양이네, 너.”
“그러니까 뭔 소리냐고.”
“다섯 명 중에 제일 고양이 같다고. 칭찬이야, 칭찬.”
“표정은 비웃고 있는뎁쇼?!”
후쿠이는 버럭 소리를 치다가 금세 포기한 듯 벤치에 깊이 등을 기대며 늘어졌다.
머리색과 맞춘 것처럼 다른 부원들과 달리 옅은 색의 고양이 귀를 단 후쿠이가 볕이 잘 드는 부실 한 구석에서, 오카무라에게 기대 잠든 사진이었다.
“난 안 찍겠다고 했는데 류 자식이 멋대로…….”
“그래도 지우지 않고 여태 잘 가지고 있는 거 보면 꽤 마음에 들었나봐?”
“아니야! 매번 만날 때마다 그 녀석들이 검사하니까….”
변명을 늘어놓는 후쿠이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제 얼굴에 열이 오른다는 것을 깨닫고 거칠게 뒷머리를 헤집으며 입을 다물었다. 마유즈미가 거 보라는 식으로 피식 웃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지만 그럴 듯하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안 그런 거 같으면서 은근 후배에게 약하구나.”
“떫냐?”
“아니. 덕분에 좋은 구경 감사하다고.”
마유즈미는 그 이후로도 몇 컷 더 이어진 후쿠이의 고양이 귀 사진을 보란 듯이 넘겨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오카무라 사진만 보여주고 끝냈어야 했는데. 후쿠이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마유즈미는 물끄러미, 잔뜩 불만이 들어찬 후쿠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후쿠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뭐야?”
“아니, 네코미미 단 거 실물로 보고 싶어서.”
“꺼져.”
“매정하네. 내가 마이우봉도 이렇게 잔뜩 뽑아줬는데.”
“아이스크림 사줬잖아.”
“너 네코미미 달고 타마야 가면 타마가 정말 좋아할 듯?”
“시끄러워! 내가 할 거 같냐?!”
말 같잖은 소리를 해대는 마유즈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후쿠이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여름날이라 그런지 얼굴에 후욱 열이 올랐다. 역시 같은 고양이 귀라고 말해도, 마유즈미가 말하는 고양이 귀는 뭔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 *
마유즈미가 자신에게 고양이 같다는 말을 자주 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몰라도 요즘 은근, 고양이와 엮이는 일이 많았다.
도쿄로 오기 전에도 그랬던가? 이 전까지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교 시절 때는 기숙사 생활이라 조금 뜸했지만 고향집이 있는 동네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개나 다른 동물들도 자유롭게 길거리를 누비는 시골이었으니까. 주인이 있는 동물들도 아무렇지 않게 마을을 돌아다니는 마당에 주인 없는 떠돌이 동물들이야 오죽하랴. 아키타견의 지방답게 확실히 고양이보다는 개가 많았던 것도 같지만.
그렇게 어렸을 적부터 아무렇지 않게 동물들과 접하며 살아온 후쿠이는 그래서 자신이 고양이와 친하다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남들처럼 고양이라면 껌뻑 죽는 고양이 애호가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냥 자신에게 다가오면 귀엽다고 조금 쓰다듬어주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후쿠이는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서너 마리의 고양이를 보며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얘들아, 미안하지만 형은 뭐 줄 게 없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고양이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어주며 그렇게 말해보았지만 고양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야옹야옹 울어댔다. 결국 그들이 만족하고 떠나갈 때까지 잔뜩 쓰다듬어주고 난 뒤 기운이 쪽 빠진 후쿠이는 공원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그 뒤쪽에 있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여전히 인기 많네.”
“으악 깜짝이야!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라고!”
“말해도 못 들으면서.”
“아, 몰라. 지금은 너랑 실랑이 할 기운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연하게 말을 걸어오는 마유즈미의 목소리에 내심 안도감을 느낀 것을 후쿠이는 깨닫지 못한 척했다.
잠시 정적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운 여름날에 밖으로 나온 기운 찬 아이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만 저 멀리에서 배경음처럼 들렸다.
잠시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젖히고 있던 후쿠이가 그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있던 시합 봤어?”
“재버워크랑 스터키?”
후쿠이가 자리에 앉고 나서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은 책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든 마유즈미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후쿠이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을 살짝 들춰 마유즈미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혼자 납득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젖혔다.
“아, 라쿠잔의 히구치도 스터키였지.”
“뭘 혼자 납득하고 있어, 기분 나쁘게.”
“히구치가 있었으니 봤겠구나.”
“내가 왜.”
“히구치랑 친했을 거 아냐.”
“아니 별로.”
마유즈미의 그 반응에 후쿠이가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마유즈미가 황급히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그런 반응이면 꽤 친했다는 말이네.”
“왜 결론이 그렇게 나냐.”
잔뜩 찌푸린 마유즈미의 얼굴을 보고 후쿠이는 낄낄 웃었다. 마유즈미가 작게 혀를 찼지만 후쿠이의 웃음을 멈추진 못했다. 그렇게 후쿠이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고 나서 마유즈미가 책을 덮고 입을 열었다.
“그 시합 이후에, 오카무라랑 뭔 일 있었어?”
“우와, 소름. 내 속마음 읽은 거야? 너도 이마요시처럼 사토리?”
“사토리는 무슨. 네 얼굴에 빤히 적혀 있다.”
후쿠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싸웠어.”
“……그, 오카무라랑?”
“아, 그래 말 잘못했다. 내가 멋대로 화냈어. 됐냐?”
“왜 화를 내고 그래.”
후쿠이는 자신이 소리를 높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마유즈미를 보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무슨 일인데. 후쿠이를 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로 시선을 돌린 채 묻는 마유즈미를 힐끔 돌아보고 후쿠이가 비릿하게 중얼거렸다.
“왜 답지 않게 신경 써주는 척?”
“네가 신경 써 달라는 분위기로 옆에 있으니까 겸사겸사. 마침 가져온 책도 다 읽었고.”
“아, 그러냐.”
후쿠이는 심드렁한 투로 대답하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평소의 후쿠이를 생각한다면 한없이 기운이 없고 약해진 모습이었다.
“아니, 난 기껏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게 대하려고 했단 말이야. 제일 분하고 열받는 건 그 녀석들일 테니까. 근데 울분을 토해내는 것도 아니고 짜증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재버워크에 대한 불만 얘기하려 치면 바로 왜 그런 식으로 얘기하냐고 그러고. 아니 제일 열받는 게 뭔 줄 알아? 그날 기껏 그렇게 기분 전환 시켜주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오카무라 그 자식이, 자기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묻더라고. 나 순간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 내가 너무 잘해줘서 그런 말을 한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이상하잖아? 그럴 땐 보통 나더러 자기한테 뭔가 잘못한 거 있냐고 묻지 않아? 그래서 왜 그딴 소리 하냐고 나도 모르게 몰아붙였더니 제대로 말을 못해서…….”
“그대로 뒤엎고 와버렸다는 거군.”
“아 몰라. 기분도 꿀꿀한데 냉우동 먹으러 갈래?”
“그놈의 우동 더럽게 좋아하네. 모리야마랑 우동집 탐방 다닌다면서.”
“걱정 마, 타마야는 안 데려갔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 이것 때문에 말한 거 아니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 후쿠이의 모습에 마유즈미가 잠시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자신이 눈치 없는 사람이 된 거 같아 기분이 이상해진 후쿠이는 조금 움츠러든 몸짓으로 벤치에 기댔다. 그러면서 괜히 이 어색함을 무마시키려는 것처럼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혼자 노는 게 좋다는 식으로 지내더니 모리야마랑은 자주 연락하나 봐? 나랑 우동집 다니는 건 어찌 알았대?”
“내가 안 물어도 그쪽에서 알아서 여기저기 다 말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냐? 그건 몰랐네.”
“야.”
마유즈미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놓고 제 시선을 피하고 있는 후쿠이를 보다가 다시 이마 한쪽을 짚었다.
“너야말로, 나랑 친하다고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녔나 보더라?”
“뭐, 뭐?”
“안 그러면 너랑 관련된 일을 다른 애들이 나한테 얘기를 할 이유가 없는데.”
“무, 슨 소리야?”
후쿠이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유즈미를 올려다보았다. 마유즈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뭐 사실관계가 정확히 어찌 되었든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투로 운을 띄운 마유즈미는 들고 있던 라이트노벨로 후쿠이의 이마를 약하게 톡 건드렸다.
“오카무라가 네 기분 상하게 한 거 같다고, 나한테 연락해온 시점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엥? 오카무라가…너한테?”
“너랑 나랑 친하니까 말주변 없는 자기 대신 너한테 잘 좀 말해달라고 하던데.”
후쿠이는 정말 크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유즈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천천히 얼굴을 찌푸리는 후쿠이에게 마유즈미는 기다리지 않고 다음 말을 던졌다.
“네가 평소랑 다르게 대해서 불안했대. 그날 만나고 나서 한 번도 고릴라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그거 신경 쓰다가 말이 약간 헛나갔다던데?”
평소에 얼마나 고릴라라고 부르는 거야. 웃음기가 섞인 마유즈미의 말에 후쿠이는 충격 받은 얼굴을 한 채 멍하니 있다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상대방이 너무나 확실한 통화는 후쿠이가 통화버튼을 누르고 나서 거의 바로 연결되었다.
“네가 드디어 자신의 자아를 찾았구나, 망할 고릴라야. 그렇게 고릴라 취급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막상 안 불러주니까 섭섭했어요? 그럼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너 내가 진짜……아, 안 울어! 내가 울긴 왜 울어, 턱릴라야! 그래서, 너 지금 뭐하는데.”
내리 울먹이는 목소리였으면서 꿋꿋하게 강한 척을 한다. 마유즈미는 눈물은 흐르지 않지만 한없이 붉어진 후쿠이의 눈가를 눈에 담았다. 파르르 떨리던 후쿠이의 입가에 겨우 미소가 드리웠다. 그렇게 한참을, 마유즈미를 두고 푸딩이니 카레니, 너는 뭐가 좋은데, 라고 오카무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말을 늘어놓던 후쿠이의 몸이 멈칫 경직됐다.
“뭐, 뭐? 그건 왜? 정말 그게 좋아? 그거면 기운 나냐?”
울먹이느라 떨렸던 목소리와는 다른 의미로 떨리는 목소리에 마유즈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후쿠이가 흠칫 고개를 돌려 마유즈미를 보고는 허겁지겁 화제를 돌려버렸다. 마유즈미는 특유의 못마땅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후쿠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 가?”
“이제 볼일 끝났으니까 가야지. 넌 오카무라 기운 나게 해주러 갈 거잖아?”
“아니, 그건 오늘 아닌데…….”
“그래서, 나랑 볼일 있어?”
“딱히 그렇다기 보다는…….”
자기도 왜 마유즈미를 붙잡았는지 잘 모르겠어서 힘없이 잡고 있던 그의 옷자락을 놓은 후쿠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마유즈미. 다음에 한턱 쏠게.”
마유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짧게 손을 들어 흔들고는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그 도도한 모습이 꼭 고양이를 떠올리게 해, 후쿠이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나보고 고양이 같다고 할 게 아닌데, 저 녀석.”
* * *
굳이 만나자고 얘기를 하지 않아도 일주일의 두세 번은 꼭 타마야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아마 그만큼 생활 패턴이 비슷하고, 그만큼 그 작은 가게에 자주 온다는 말이 되겠다. 후쿠이는 처음 자신이 앉았던 테이블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자신에게 뛰어 내려온 타마를 안고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으며, 자신의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던 마유즈미가 혀를 끌끌 찼다.
“고양이가 손님 앉는 테이블에 아무렇지 않게 올라가고, 위생으로 말 나오면 어떡하려고.”
“뭐, 어때. 타마가 가게에 있는 시간 많아지면서 아예 밖에 주의문도 붙여놨잖아.”
고양이 싫어하거나 고양이 알레르기 있는 사람들은 이 죽여주는 맛도 모르고, 불쌍하네. 후쿠이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타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기분 좋은지 타마가 듣기에도 기분 좋아지는 소리로 길게 울었다.
“타마가 후쿠이쨩, 자리 맡아놓는 느낌이야. 예전에도 자기 마음에 드는 손님이 앉았던 자리, 아마 저 형씨가 앉았던 저 구석자리일걸, 거기에 자리잡고 앉아서 다른 손님들 못 앉게 하다가 그 손님이 오면 귀신 같이 일어나서 내려갔다니까? 거기 앉으라는 것처럼.”
자주 가게를 드나드는 만큼 눈도장을 찍어 조금 친해진 단골들이 이 재미난 화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을 걸었다. 마유즈미가 경악한 얼굴로 후쿠이쨩, 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후쿠이가 민망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뭐 어때, 귀엽고 잘 어울리니까 괜찮잖아.”
이미 술이 좀 들어가 얼굴이 벌겋게 된 아저씨들 몇이 그 말에 크게 웃으며 동의했다. 건너편에 앉은 마유즈미도 피식 웃었다.
“저 도도한 공주님께 귀여움 받고. 잘 됐네, 후쿠이쨩.”
“너 죽는다, 진짜.”
“거, 희여멀건한 형씨도 같이 세트야. 후쿠이쨩 자리만 맡을 거면 의자에 앉았을 거라고. 타마가 테이블까지 올라가는 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단 말이지.”
“세트가 뭐야, 런치 세트냐?”
“내가 잘못했네! 이런 썰렁한 말이 나오게 하다니! 그래그래, 둘이 커플이야, 커플.”
건수를 잡은 아저씨들이 자기들끼리 썰렁한 말장난을 늘어놓고 둘을 놀려먹으며 즐거워했다. 마유즈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때마침 나온 식사로 시선을 돌렸다. 후쿠이는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렇게 엮지 마세요. 이 녀석 이미 임자 있는 몸이니까.”
“헉, 후쿠이쨩을 두고 어떤 녀석이랑.”
“카구야땅이라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후쿠이.”
기가 찬 음색으로 저를 부르는 마유즈미에게 후쿠이는 찔끔한 표정으로 혀를 내밀어보였다. 정색한 마유즈미의 반응에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둘을 놀렸던 건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손님들은 곧 회사 생활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으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이어갔다.
“뭐 저런 말에 일일이 대응해주고 있어.”
“응? 뭐 어때, 장난이니까 나도 그냥 가볍게 받아친 건데.”
후쿠이의 말에도 마유즈미의 표정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후쿠이는 눈만 굴리며 하염없이 눈치만 보다가 오늘 자신의 몫으로 나온 후식, 귤 하나를 마유즈미의 접시에 옮겼다.
“내가 카구야땅 말한 것 때문이라면 사과할게.”
“그런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귤은 돌려주지 않는 마유즈미의 모습에 후쿠이는 작게 웃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떠들며 식사를 하는데 또 다시 단골 손님이 후쿠이를 찾았다. 후쿠이는 우동면발을 황급히 입에 넣고 고개를 돌렸다.
“뭐예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건데.”
“후쿠이쨩은 개라기보다는 고양이니까 괜찮아.”
“그게 무슨 논리예요.”
“에이, 미안미안, 형아가 귤 줄까?”
“음, 귤을 봐서 이번 한번만 용서해 드릴게요.”
후쿠이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저씨들이 끅끅 웃으며 좋아했다. 마유즈미는 나이든 어른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 후쿠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짓궂은 어른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며 웃는 후쿠이를 보고 있던 마유즈미에게 후쿠이가 휙 고개를 돌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찔린 마유즈미가 모르는 척 오늘의 정식 반찬으로 나온 생선살만 헤집었다.
“마유즈미는 개파지?”
“뭐가?”
“개냐 고양이냐 하고 물어보면 개 아니야?”
후쿠이와 어른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개가 좋은지 고양이가 좋은지에 대한 대화를 했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렇지만 후쿠이가 왜 자신의 취향을 개로 결론 지었는지 알 수 없었던 마유즈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아니, 너 전에 고양이 싫어한다고…….”
“내가 언제?”
“와, 거봐, 역시 저 형씨도 고양이파라니까? 아, 후쿠이쨩이 완전 좋아하는 친군인데 형씨라고 부르는 건 좀 그런가? 그럼 마유유쨩!”
“푸흡.”
마유즈미의 표정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진 것을 보고 결국 후쿠이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지 마. 마유즈미의 말에도 쉽사리 웃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던 후쿠이는 마유즈미가 라이트노벨로 제 머리를 꾹 밀어 누르고 나서야 겨우 웃음을 삼켰다.
그나마 마유즈미에겐 불행 중 다행으로, 후쿠이가 자지러지게 웃은 덕분에 마유즈미에게 향했던 질문의 화살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는 거였다. 자신이 어떤 답을 내놓아도 결국 남 놀리기 좋아하는 저 어른들에게 잡혀 물어뜯길 것을 알았던 마유즈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기척이 희미하기 덕분에 관심이 쏠려도 금세 흐지부지 되는 것이리라. 아마 후쿠이와 함께여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실제로, 후쿠이와 함께 있지 않을 땐 저들에게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물론 점원도 마유즈미가 있는 걸 눈치채기까지 상당히 오래 걸려 주문하는 것에 애를 먹을 때가 있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식사시간을 방해받을 염려는 없었다. 그만큼 밋밋하고 조용한 식사시간이었다.
“음, 전 고양이도 개도 다 좋은데. 고향집에서 키우는 건 개거든요.”
“고향집? 후쿠이쨩 도외에서 왔어? 어디, 아키타?! 아키타견 키우나? 사진 있어?”
후쿠이는 이제 아예 제 자리에 타마를 내려놓고 어른들 사이에 휩쓸려갔다. 타마가 약간 위로하는 듯한 시선으로 마유즈미를 보며 짧게 울었다. 마유즈미는 작게 혀를 차고는 후쿠이가 제게 준 귤을 천천히 까먹었다.
“완전, 타마야의 아이돌 다 됐네. 어째 그 고양이보다 더 인기가 많아?”
“아, 미안하다니까. 비꼬지 마.”
“비꼬는 거 아닌데?”
“그 비웃는 듯한 표정이나 지우고 말하지?”
후쿠이가 흰 입김을 뿜으며 눈을 흘겼다. 후쿠이도 후쿠이대로 마유즈미와의 식사 시간을 방해 받아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평소에는 그저 가볍게 몇 마디만 건네고 말던 어른들이 오늘은 작정한 듯 이리저리 불러대고 놀려먹어서 그 맛있는 타마야의 우동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먹었다.
“다음번엔 점심 때 가야겠어.”
“왜, 다음번엔 아예 작정하고 사인회 해야 하는 거 아냐?”
“아, 진짜.”
후쿠이가 주먹으로 등을 치는데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마유즈미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제나 오카무라를 비롯해 다른 이들에게 장난을 치거나 놀리는 측이었던 후쿠이로서는 자신이 놀림 받는 이 상황이 매우 낯설었다. 어른들의 장난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전혀 모르겠달까. 후쿠이는 목도리를 조금 더 끌어올리며 힐끔 마유즈미를 올려다보았다.
“아참, 그리고.”
“으, 응?”
“난 굳이 말하자면, 고양이파니까.”
“그치만 너 전에 나한테는…….”
“그래 원래는 별 생각 없었는데, 좋아하는 애가 고양이를 생각나게 하는 애라, 좋아졌어.”
“응?”
어떤 캐릭터가? 후쿠이는 카구야 이후로 어떤 캐릭터가 고양이 귀를 달고 나와 마유즈미를 사로잡은 걸까 잠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유즈미는 생각에 잠겨 걸음이 느려진 후쿠이보다 두세 걸음 앞에 서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전혀 생뚱맞은 쪽으로 고민에 빠진 누구 씨가, 고양이 같아서 고양이가 좋아졌다고.”
“……어?”
후쿠이와 마유즈미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마유즈미는 어느새 미소를 지운 채 진지한 얼굴로 후쿠이를 마주보고 있었다. 잠시 마유즈미의 말을 해석하느라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반응이 없는 후쿠이에게 다가와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 마유즈미는 다시 그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은 채 후쿠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알려줄 만큼 다 알려줬으니까 이제 알아서 해석하고 답을 찾아 봐, 문과생.”
“자, 잠깐 마유즈미……!”
뒤늦게 정신이 들어 황급히 마유즈미의 뒤를 따라가 보았지만 인파가 조금 늘어나자마자 마유즈미의 모습을 놓쳐버린 덕분에 후쿠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미스디렉션 발휘하지 말라고. 허탈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 후쿠이는 이제야 열이 오른 제 볼을 손을 문질렀다.
그 동안 헛된 기대감을 갖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써왔는데, 방금 일어난 사건으로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바보 같은 자식, 이런 건 확실하게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냐고.”
한숨처럼 내쉰 후쿠이의 입김이 희미하게 전해진 마유즈미의 감정처럼, 겨울 공기 속에서 희게 휘몰아쳤다.
* * *
“전에 우리가 너무 놀려서 둘이 싸운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에요. 평소에도 여기서 만나자고 정하고 오는 거 아닌걸요.”
“후쿠이쨩도 얼마간 안 오고, 마유유쨩도 전만큼 자주 안 온다고 하고…둘이 안 오니까 타마도 기운이 없고.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하하, 죄송해요. 방학 때 잠시 본가에서 지내느라 그랬어요. 아, 저희 강아지 사진 찍어왔는데 보실래요?”
볼래볼래! 전에 분명 자신들은 고양이파라고 고양이가 더 좋다고 소리 높여 외치던 손님들이 순식간에 후쿠이의 휴대전화로 몰려들었다. 귀여워! 같이 있는 애는 누구야? 후쿠이쨩 아들?! 동생이에요! 우와 진짜 닮았다, 귀여워. 어른들의 반응이 어째 더 아이 같아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난 후쿠이는 어느 샌가 자신의 지정석이 된 것 같은 구석 테이블에 앉아 천천히, 볼 필요 없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오늘의 정식과 오늘의 우동. 그때와 변하지 않은 메뉴. 후쿠이는 다른 사람들이 먹는 정식 메뉴를 힐끔 보고는 점원을 불렀다.
“오랜만이네. 본가 다녀왔다더니 얼굴에 윤기 흐르는 것 좀 봐.”
“아하하, 저 살쪘다는 말이죠, 그거.”
“글쎄. 그나저나 타마가 매일같이 기다렸는데 하필 오늘 마실을 나갔네?”
“저녁 먹고 있다 보면 오겠죠?”
“네 친구도 그렇고.”
어쩐지 떠보는 것처럼 웃으며 묻는 점원에게 후쿠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정식으로 주세요.”
“어? 오늘 키츠네 우동인데 우동 안 먹고?”
"그래요? 으아, 완전 고민된다. 오늘은 카레인 거 같아서 정식 먹으려고 했는데…야채카레예요?”
“아니, 해산물카레.”
“아, 완전 좋아. 그럼 정식으로 결정!”
“그렇게 좋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거든요. 해산물 카레.”
어린 아이처럼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 후쿠이를 보고 점원이 쓰게 웃는 사이에 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회색 고양이가 바람처럼 튀어와 당연하다는 듯 후쿠이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타마, 오랜만! 잘 지냈어?”
저를 쓰다듬는 후쿠이의 손에 얼굴을 부비는 타마가 작게 우는 소리 뒤로, 조금 딱딱하게 굳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너 좋아하는 음식 우동 아니었어?”
“어?”
“어이구, 깜짝이야. 누군가 했더니 타마가 후쿠이쨩 쓸쓸할까봐 마유유쨩 데려왔구나. 착하기도 하지.”
점원의 말에 타마가 긍정하는 것처럼 울음소리를 냈다. 후쿠이가 당황한 얼굴로 점원과 마유즈미를 번갈아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러니까 너랑 나랑 세트 취급 받지.”
“커플 아니었나?”
“아, 진짜. 사장님한테 점원 바꿔달라고 할까.”
“아하하, 마유유쨩은? 오늘은 우동? 정식?”
“우동으로.”
“예이.”
점원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후쿠이는 어색함을 감추려는 것처럼 물을 따라 마유즈미 앞으로 밀어놓았다. 마유즈미는 그 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취조실에 앉은 형사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후쿠이를 보았다.
“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해산물 카레라고?”
“어? 응, 맞아.”
“그럼 모리야마랑 우동집 탐방 다닌 건?”
“그거야……모리야마가 혼자 먹기 쓸쓸하다고 하니까…….”
“여기서 나랑 밥 먹을 때 매번 우동만 시켰던 건?”
“그건….”
“그건?”
후쿠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에 점원이 후쿠이의 카레를 먼저 가져왔다. 메뉴가 적어 음식이 빠르게 나오는 게 장점인 타마야인만큼 마유즈미의 우동도 바로 뒤따라 나왔다. 거의 언제나 마유즈미가 정식, 후쿠이가 우동을 먹었는데 오늘은 그 반대가 된 상황이라 단골들이 웃으며 한 마디씩 건넸다.
“후쿠이쨩, 좋아하는 우동 두고 오늘은 웬일로 정식이야?”
“우리 지금까지 속은 거예요. 후쿠이쨩이 제일 좋아하는 게 해산물 카레래요.”
“아니, 그게 정말이야? 사장님! 이제 메뉴에 오늘의 카레도 넣어야 하는 거 아냐?!”
“맞아, 후쿠이쨩이 카레를 좋아한다는데!”
후쿠이는 카레 그릇에 거의 얼굴을 박고 기계적으로 손만 움직였다. 이런 상황이면 음식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만도 한데, 우동으로 후쿠이의 혀를 사로잡았던 타마야의 맛은 이번에도 후쿠이에게 진정한 해산물카레의 맛을 보여주었다.
“역시 타마야의 아이돌. 여전히 식지 않은 인기네.”
“시끄러워.”
“유부 먹을래?”
“……주세요.”
제일 좋아하는 카레를 고르긴 했지만 역시 달달한 유부의 맛도 포기할 수 없었던 후쿠이는 순순히 마유즈미가 건네는 유부를 받아 입에 넣었다. 아 역시 맛있어. 후쿠이는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처럼 자신의 몫으로 나온 후식을 마유즈미에게 건넸다. 오늘의 후식은 푸딩이었다. 지긋한 나이의 아저씨들이 주 고객인데 웬 푸딩이냐 싶겠지만 푸딩은 아저씨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후식 중 하나였다.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단골들의 말로는 후식도 사장님이 전부 직접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후쿠이는 카레가 듬뿍 담겨 있던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배를 두드렸다. 후쿠이의 무릎에 꾹꾹이를 하고 있던 타마가 식사를 끝마친 후쿠이를 보더니 휙 내려와 그제야 자신의 식사를 하러 갔다. 이제 후쿠이가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아는 듯 보이는 행동이었다.
“타마 진짜 똑똑하네.”
“그러게, 너 왔다고 나도 부르러 오고.”
“어, 정말?”
“나 다니는 길목까지 와서 울어대는 통에 그냥 갈 수가 있어야지.”
마유즈미는 심드렁한 투로 말하고는 하나 남은 푸딩을 크게 떠 후쿠이에게 내밀었다. 뭐야? 시선만으로 묻는 후쿠이에게 피식 웃어준 마유즈미는 몸을 내밀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너 여기 푸딩도 좋아하잖아.”
내말 틀려? 다 알면서 묻는 마유즈미에게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한 후쿠이는 마유즈미가 들고 있는 숟가락을 받으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마유즈미가 그 언젠가처럼,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느낌으로 그 손길을 피했다. 어린아이들 같은 작은 공방이 짧게 이어졌다. 결국 마유즈미의 손에서 숟가락을 탈환하지 못한 후쿠이는 마유즈미와 푸딩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벌려 그 노란 간식을 받아먹었다.
기분 좋아지는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작게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아, 둘이 아저씨들 앞에 두고 대담하기도 하지!”
“내가 먹여줄까? 자, 아앙!”
“어허, 먹여준다면 후쿠이쨩이 먹여주는 게 더 좋지.”
이런 상황에 더 호들갑을 떨 것처럼 보이는 중년의 여성 둘은 그저 웃고만 있는데 아저씨들 몇몇이 아주 난리가 났다. 그 반응을 마주한 후쿠이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익었다. 마유즈미는 큭큭 웃으며 국어책 읽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이야, 후쿠이 군, 대담하기도 하지. 다들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너, 다 알고…….”
“안 먹는다는 선택지도 있었는데 말이야.”
후쿠이가 입을 떡 벌렸다. 어쩐지 마유즈미와 다른 손님들 손 위에서 놀아난 기분이 들었지만 그 울분을 시원하게 토해낼 곳이 없었다. 후쿠이는 자신이 먹어 비어버린 숟가락을 뺏어 바람처럼 남은 푸딩을 퍼올리곤 웃고 있는 마유즈미의 입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갑작스러운 후쿠이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한 마유즈미가 작게 숨 막힌 것 같은 소리를 냈지만 그걸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일어난 후쿠이는 알아서 계산하고 나오라는 것처럼 지폐를 던지듯 내려놓고 바람처럼 가게를 나섰다.
“그러게, 왜 애를 이상하게 놀리고 그래요. 후쿠이쨩 다신 안 오면 어쩌려고.”
“아니, 언제나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던 애였는데…오늘따라 당황하는 모습 보여주는 게 신선해서 나도 모르게….”
아주머니들의 앙칼진 공격을 받은 아저씨가 깨갱한 모습으로 몸을 움츠렸다. 마유즈미는 말없이 자신에게 와 박히는 시선을 느끼곤 천천히 일어났다. 가게에 있는 전부가 얼른 후쿠이에게 가보라는 시선을 주고 있었다.
“마유유쨩, 오늘 둘 음식 값은 우리가 낼 테니까 얼른 가봐.”
“맞아, 맛있는 거 사주고 우리 대신 기분 좀 풀어줘.”
후쿠이가 두고 간 지폐 위에 또 한 장의 지폐를 얹어 마유즈미 손에 쥐어 준 아저씨가 울상인 표정으로 마유즈미의 등을 밀었다. 보면 타마와 후쿠이를 제일 귀여워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마유즈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타마야를 나섰다. 카운터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타마도 걱정하는 듯한 소리로 길게 울었다. 아니, 어쩌면 걱정보다는 마유즈미를 응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유즈미는 그 소리를 등에 업고, 생각보다 빨리 후쿠이를 찾았다.
타마야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좁은 골목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길고양이를 손으로 얼러주고 있는 후쿠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마유즈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쿠이.”
마유즈미의 목소리에 축 처져 있던 후쿠이의 등이 파드득 긴장으로 굳었다.
마치 녹슨 소리가 날 것처럼 뻣뻣하게 뒤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경악이 담겨 있었다.
“있으면, 있다고 가까이 오기 전에 말을 해.”
“미안.”
이번엔 말하지 않았으니 순순히 사과해본다. 후쿠이는 천천히 다리를 펴고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아저씨들 화났어? 아니 너 걱정하던데. 아, 죄송하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후쿠이의 말에는 선명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
“히로다 씨가 너 맛있는 거 사주래. 뭐 먹을래?”
“뭐? 그런다고 덥석 돈 받아오고, 너 미쳤냐? 됐어, 다음에 그대로 돌려 드려.”
“쳇.”
마유즈미는 보란 듯이 혀를 차고는 히로다 아저씨가 준 돈을 고이 접어 넣었다. 외형과 다르게 착실하고, 입은 험하지만 성품 자체는 곧은 후쿠이라면 이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럼 내가 내 돈으로 사주는 거엔 불만 없지?”
“…어?”
“뭐 먹을래? 참고로 거절하면 얄짤없다?”
후쿠이는 단호한 마유즈미의 말에 잠시 눈을 굴리다가 포기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핫초코.”
마유즈미는 작게 웃으며 따라오라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했다. 후쿠이와 놀고 있던 길고양이가 가지 말라는 것처럼 울었다. 마유즈미는 머뭇거리는 후쿠이의 팔을 잡아 끌며 고양이를 향해 강하게 말했다.
“저리 가, 얘한테 붙는 고양이는 그 회색 털뭉치로 충분하니까.”
“우와, 너 타마한테 이를 거야.”
“그러든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마유즈미에게 후쿠이는 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영문을 알 수 없는 마유즈미의 발언을 들었을 때부터, 마유즈미의 말과 행동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조리 알 수 없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 골목과 멀어질 동안 내내 후쿠이의 손목을 잡고 있던 마유즈미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 길목에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후쿠이의 팔을 놓아주었다.
팔을 놓으면 무언가 바로 말할 거라 생각했는데 후쿠이는 입술만 앙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또, 기분이 가라앉은 걸까. 자신의 행동에 후쿠이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게 조금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계속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여줘 뒤늦게 조금 거북한 기분이 든 마유즈미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차며 길가에 늘어선 자판기 앞에 섰다.
“자판기 코코아도 괜찮지?”
“내가.”
“응?”
“작년에 내가 너랑 만나고 난 뒤로 먹은 우동……거의 100그릇 넘더라?”
“…뭐야 갑자기.”
뜬금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판기 버튼을 앞에 두고 굳어버린 마유즈미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뜨끈한 캔 어묵탕 버튼을 눌러버렸다. 한 번도 뽑아본 적이 없는 어묵탕은 생각 이상으로 묵직한 소리를 내며 자판기 아래에 굴러 떨어졌다.
“그 중에 너랑 먹은 우동이 거의 80그릇.”
“후쿠이?”
“제일 좋아하는 건 해산물 카레지만, 역시 우동도 좋아.”
“그래그래, 알았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다고, 추천해줬거든.”
“……응?”
설마 모리야마? 조용히 충격에 휩싸인 마유즈미의 얼굴을 보고 후쿠이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누굴 떠올린 거야? 표정 완전 웃겨.”
“모리야마야?”
“푸핫, 여기서 왜 걔가 나와?”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후쿠이의 모습에 마유즈미는 말문이 막혔다. 걔, 키츠네 우동 좋아하잖아. 그렇게 둘이 같이 우동집을 전전했는데…. 후쿠이는 한바탕 웃음을 토해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좋아하는 사람덕분에 우동도 좋아졌으니까 겸사겸사 같이 다닌 거지.”
“…….”
“내가 이과생을 배려해서 숫자까지 얘기했는데.”
“차근차근 얘기해봐.”
“자기도 배려 없이 마구잡이로 던져놓고는 나한테는 왜 이래.”
“너…….”
“내가 지금까지 고민해서 얻은 답이 정답이라면, 내가 지금 너에게 던지는 문제랑 같은 답일 거야. 아 주어랑 목적어는 서로 반대인가.”
마유즈미는 빙긋 웃는 후쿠이의 미소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숫자만 들어간다고 이과생 배려한 문제라고 말하지 마, 바보 문과생아.”
“시끄러워. 네가 낸 문제는 뭐 괜찮았는지 알아?”
마유즈미의 푸념에 민망한 표정으로 버럭 화를 낸 후쿠이는 다시 머뭇대는 손길로 마유즈미의 옷자락을 잡았다. 조금 푸근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의 기운에, 둘의 코도 볼도 발갛게 얼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의미로 붉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답은? 맞아?”
“확실하게 말해야 채점해주지.”
“그럼 너부터 말해봐.”
“싫어, 네가 먼저 맞춰야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아 그래, 그럼 동시에 말해!”
질 수 없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 후, 함께 천천히 숫자를 새고 동시에 말한, 감정의 답은――.
* * * * *
“생각해보면, 누가 볼지도 모르는 길거리에서 참 부끄러운 짓이었네.”
후쿠이는 깊이 잠든 마유즈미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하며 피식 웃었다. 그 옛날, 아니 옛날이라고 하기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마유즈미와 지금처럼 깊은 관계가 되기 이전의 추억을 곱씹게 되어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계기는 역시, 오늘 있었던 모임 때문이겠지. 후쿠이는 마유즈미와 같이 잠든 작은 회색 고양이의 몸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고는 조용히 담요를 찾았다. 따뜻한 날이지만 그래도 역시 얇은 담요라도 덮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소파에서 불편하게 잠들었으니 아예 깨워서 침대로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마유즈미가 아침까지 작업하다 지금 겨우 잠든 것을 아는 후쿠이로서는 기분 좋게 자고 있는 그를 깨우기가 조금 거북했다.
“잘 거면, 처음부터 침대에서 자면 좋은데……어?”
마유즈미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고 난 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든 후쿠이는 제 손을 잡아오는 온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잠에서 깼는지 마유즈미가 졸음이 잔뜩 묻어있는 눈으로 후쿠이를 보고 있었다.
“너, 기다리다가…….”
“아,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오면 깨우라고, 여기서 잔 거야.”
“그냥 푹 자고 있지. 몇 시에 누웠어?”
“10시 정도……?”
뭐야, 다섯 시간도 채 못 잤잖아. 비척대는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켜 제 어깨에 기대는 마유즈미의 등을 토닥이던 후쿠이가 부스스한 마유즈미의 머리를 쓸어 정돈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품에 안긴 회색 고양이는 마유즈미와 달리 아주 잘 자고 있었다.
“뭐야, 마루만 안아주고.”
“씻고 오면 잔뜩 안아줄게.”
“쳇.”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지만 마유즈미는 별말 없이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후쿠이의 발치에, 또 다른 작은 고양이가 다가와 작게 울어댔다.
“왜 그래, 하나. 아, 목말라?”
제 어미를 닮아 똑똑한 모양인지 비어있는 물그릇을 앞발로 두드려대는, 치즈태비의 하나를 보고 후쿠이는 또 한 차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쿠이의 등에 묵직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후배들하고는 잘 놀았어?”
뒤에서 저를 껴안은 마유즈미의 무게를 익숙하게 버티며 하나의 물그릇에 물을 담아준 후쿠이는 뒤늦게 일어난 마루도 그 옆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마유즈미는 그때까지 내내 후쿠이의 등에 매달린 상태였다.
아닌 것 같으면서 은근 어리광이 심하다니까. 이런 어리광은 그와 몇 년 사귀어 오면서 새로이 알게 된 마유즈미의 모습 중 하나였다. 아마 이런 모습을 그의 후배나 다른 이들이 알면 놀라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응? 잘 놀았냐고.”
“그럼, 오카무라한테 사귀는 사람 생겨서 그걸로 또 엄청나게 시끌벅적했지.”
“아, 후배들은 몰랐다고 했던가.”
“알면 장난치다가 초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역시나, 그 반응이 나왔어.”
쿡쿡 웃으며 말하는 후쿠이의 말에 마유즈미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떨어져 나와 소파에 푹 몸을 기댔다.
“제인구달 드립?”
“응. 오카무라도 이젠 해탈했는지 그냥 웃고 말더라.”
“강해졌네. 고릴라도.”
“응, 그래서 내가 대신 혼내주고 왔어. 고릴라를 비롯한 모든 생명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 두고 그러면 못 쓴다고.”
“……너도 여전하구나.”
“엥, 그런가? 뭐 아무튼 간만에 만나니까 좋더라고. 저번 달에는 다들 휴일이 어긋나서 못 만났으니까…. 아무래도 감회가 남다르네.”
“그러고 보면, 너희 은근 자주 모이네. 우리만큼이나 개인플이 강할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야, 라쿠잔에선 너만 개인플이 강한 거지. 거기에 너희도 주기적으로 뻑적지근하게 모이잖아. 아카시 주최로.”
“그거 그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유즈미의 시선이 아득한 어딘가를 향했다. 가끔 아카시에게서 날아오는 모임 초대장―을 가장한 통보문―을 받고 나면 마유즈미는 꼭 저렇게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모습으로, 후쿠이에겐 보이지 않는 구름 너머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언제 어떻게 둘의 관계를 알게 되었는지 그 초대장에는 후쿠이와 함께 와도 좋다는 문장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그렇지만 마유즈미가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아직 라쿠잔의 정기 모임에 한 번도 참석해보지 못한 후쿠이는 다음번에는 마유즈미 몰래 아카시와 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참석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조만간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둘의 관계를 말해야지. 뭐 눈치 빠른 몇은 이미 알고 있을 것도 같았지만. 그들도 내심 후쿠이의 입으로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이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래서, 몇 박 며칠 어디 놀러가기 좋은 이 황금연휴에 시커먼 남자들끼리 모인 이유가 뭐야? 네 생일 때 모이기 힘들어서 미리?”
“아니 생일 땐 또 생일 모임 할 거야.”
“징하다. 미리 말하지만 당일은 안 돼.”
“그래그래, 당일은 마유유를 위해서 비워놓을게요.”
평소 같으면 마유유라고 부르는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을 텐데, 지금은 그래, 그래야지 라는 표정을 지어서 후쿠이는 순간 실소를 터뜨렸다.
“아, 아무튼…오늘은, 말하자면 요센시절의 내 기념일이라 모인 거야. 그때만 한번 단발로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후배들이 계속 챙겨주더라고. 뭔가 매우 마음에 들었나봐.”
“기념일?”
내가 모르는 네 기념일이 대체 뭔데.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마유즈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 후쿠이는 쓰게 웃었다. 안 그럴 거 같으면서 묘하게 집착도 강한 남자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쿨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 요센 스타팅멤버였을 때 번호가 5번이잖아. 그래서 5월 5일이 내 기념일.”
“허어….”
“아, 미안 역시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힘들지. 시작부터 말하자면…내가 아직 2학년일 때, 3학년들이 은퇴하고 오카무라가 주장, 내가 부주장 달았을 때부터. 만장일치로 주장이 됐는데도 오카무라 성격이 그래먹어서 초반에 엄청 불안해했거든. 잘할 자신이 없다, 내가 아니라 후쿠이가 주장을 하는 게 낫다 그러면서. 내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그 멍청한 고릴라가. 아무튼 그래서 내가 후배들이랑 계획해서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줬지. 주장 힘내라는 의미에서. 주장의 번호인 4가 연달아 있는 4월 4일에. 그게 잘 먹히기도 했고, 후배들이나 다른 부원들도 꽤 즐거웠는지…5월 5일에 나한테도 해주더라. 그래서 어쩌다보니 달마다 쭉 하게 됐어. 근데 히무로랑 류가 그 기념파티 엄청 마음에 들어 하더니,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뭐 이렇게 된 거야.”
“그 무라사키바라도 꼬박꼬박 나와?”
“뭐 분명 히무로가 먹을 걸로 꼬셨겠지.”
그 커다란 몸집의 아이 같은 천재는 여전히 이런 식으로 다뤄지는 모양이다. 뭐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어울려 주는 거겠지만.
마유즈미는 그 아카시와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대화를 나누던 무라사키바라를 떠올렸다.
“뭐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오카무라도 조만간 결혼할 거 같고. 다들 이래저래 바쁘니까. 류나 히무로는 일본에서 주로 지내는 것도 아니니까.”
“하긴.”
마유즈미는 후쿠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관심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어쩌면, 후쿠이를 유독 잘 따르던 외국계 후배 둘을 떠올리게 돼 기분이 나빠졌을 수도 있다.
후쿠이는 쓰게 웃으며 기분 풀라는 것처럼 마유즈미의 팔을 도닥였다.
“등번호로 기념하는 거면 말이지.”
“응?”
“오늘 우리 기념일이기도 하네.”
“뭐?”
“나도, 5번이었으니까.”
“아, 그랬지.”
“야….”
“농담이야, 농담. 제대로 잘 기억하고 있어.”
서늘하게 가라앉는 마유즈미의 분위기에 후쿠이가 황급히 장난을 수습했다. 불만이 가득한 마유즈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춘 후쿠이가 살풋 웃었다.
“그래서, 우리의 기념일 즐기려고 점심만 먹고 온 거야.”
“그런 거면, 용서해 주지.”
“참, 우리 타마야에서 처음 만난 날도. 5월 5일인 거 알아?”
그 사실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는지 마유즈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잔뜩 놀란 마유즈미의 귓가에 후쿠이가 속살거렸다. 그때도, 요센 멤버들끼리 이렇게 5번 기념일로 만나서 놀다가 돌아가는 길이었거든.
“그래서 잘 기억하고 있어.”
부드럽게 호를 그리는 후쿠이의 입술에 마유즈미가 다급하게 제 입술을 겹쳤다. 그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입을 벌려 마유즈미의 혀를 받아낸 후쿠이가 한참만에야 떨어진 입술에 벅찬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보다 격렬한데……운명이라도 느낀 거야?”
“뭐 그럴지도.”
이번에는 후쿠이가 눈을 크게 뜰 차례였다. 평소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건 소설 속에나 존재한다고 시니컬하게 말해오던 마유즈미가 방금 자신의 말을 전면 부정한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하다고들 하니까. 이런 운명적 만남이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괜찮지 않겠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소파에 후쿠이를 눕히고 키스를 이어가는 마유즈미에게 크게 웃어 주지도 못하고 몸을 뒤틀던 후쿠이가 제 옷 속으로 파고드는 마유즈미의 손을 잡아 만류했다. 다급함이 어린 시선이 제게 닿아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렇지만―.
“그런 의미에서 늦었지만 떡밥 회수.”
“응?”
“그 옛날, 오카무라랑 나랑 싸우고 난 뒤에, 오카무라한테 그런 부탁 하라고 한 거 너지?”
“……응?”
“내가 고양이 귀 달고…고양이처럼 야옹대는 거 찍고 싶다고, 그러면 기운 날 거 같다고 하게 시킨 거…!”
“아, 아아! 그 녀석 그거 정말 부탁했어? 아니 너 정말 그거 했어?”
“모르는 척 하지 마! 너 고릴라한테 사진 받았다며! 죽을래?!”
“쳇, 역시 고릴라라 사람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한 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야, 이 새꺄.”
“뭐, 결과가 좋았으니 좋은 거 아냐?”
“웃기지 마, 나 오늘 그거 듣고 얼마나…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는지……아, 나 아직 말 안 끝났…!”
바지 속으로 파고든 손길에 후쿠이의 말이 끊겨 마유즈미는 다시금 제 입술로 후쿠이의 입을 막았다. 각도를 바꿔가며 정신없이 안을 탐하는 혀의 움직임과 이제 속옷 안으로 들어가 직접적으로 그의 중심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후쿠이는 미약하게 버둥거리고 억눌린 신음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키스와 애무로 후쿠이의 혼을 빼놓은 뒤 천천히 입술을 뗀 마유즈미는 헐떡이는 후쿠이의 입가에 잔 키스를 남겼다. 가뿐 호흡과 쾌감으로 잠시 풀려 있던 후쿠이가 너무하다는 시선으로 마유즈미를 올려다보았다.
“미안, 네코미미 달고 찍었던 네 사진이 너무 좋아서…더 갖고 싶었어.”
“그냥 나한테 말했으면…….”
“그때 내가 부탁했으면 해줬을 거야?”
후쿠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슬그머니 마유즈미의 시선을 피했다. 마유즈미가 작게 웃었다. 거 봐. 후쿠이는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리곤 길게 숨을 내질렀다.
“아아아, 그때 너한테 엄청 고마워했던 마음 지금 완전 박살났어. 그때부터…….”
“아, 그때부터 나 좋아했어?”
“몰라, 짜샤.”
삐진 듯 고개를 돌리는 후쿠이의 목선에 얼굴을 묻고 마유즈미가 작게 웃었다. 그런 마유즈미의 머리에 분노의 주먹을 내리꽂은 후쿠이가 상체를 들어 올리곤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 받은 사진 지금 내 앞에서 지워.”
“억, 레어템인데.”
후쿠이는 그 사진을 찍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잔뜩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끙끙대다가 마유즈미의 머리에 두 번째 철퇴를 가했다.
“아, 내가 그깟 고양이 귀 다시 써주면 될 거 아냐!”
“정말? 그럼 이번엔 꼬리도!”
꼬리? 그건 어떻게? 표정만으로 그렇게 묻는 후쿠이를 다시 소파에 눕히고 마유즈미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곧 후쿠이의 얼굴이 작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쳤냐?”
“걱정 마, 둘 다 좋을 거야.”
“닥쳐!”
“왜, 내가 맨날 잘 길들여주잖아. 이렇게.”
“악! 미친…! 너 언제부터 이런 능글맞은 캐릭터가 되기로 한 거야!”
“그러게. 뭐, 너랑 사귀는 거 자체가 나로서는 매우 큰 캐붕인데 이 정도의 캐붕은 괜찮지 않아?”
“안 괜찮아!”
후쿠이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타마에게서 태어난 작은 고양이 두 마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앵앵 울었다. 그 울음소리와 어우러지듯, 후쿠이의 목소리가 가는 신음으로 변하기까지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둘의 기념일이 시작된 것을 알리는, 흥분과 쾌락의 종소리가 울리기까지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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