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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의 농구]
키요시 텟페이 x 코가네이 신지
2017. 01. 08. 제2회 대운동회 때 배포했던 글입니다. 키요시 생일을 맞아 웹공개 합니다!!!
<주 의>
*키요시의 부모님 설정 날조가 있습니다.
*원작배경 + 미래날조 세이린 2학년조의 1학년 시절 날조도 있습니다. 결론은 날조파티
6월이 되자마자 비의 냄새가 강해졌다. 예년보다 조금 이른 장마의 시작이었다.
그날도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강한 빗줄기에 코가네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교직원들의 총회로 단축수업이 이루어지고, 학생들의 빠른 하교를 위해 동아리활동도 전면금지가 된 학교는 순식간에 회색빛 침묵 속에 휩싸였다. 들리는 것은 나뭇잎과 바닥을 세차게 내리치는 굵은 빗소리뿐이었다.
코가네이가 그런 학교에 혼자 남아 왜 이렇게 청승을 떨고 있냐하면, 점심시간에 친구와 우산으로 칼싸움을 하다가 망가뜨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미토베와 함께 하교를 하면 우산을 같이 쓰고 갔을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미토베는 소학생인 동생이 코가네이처럼 우산을 망가뜨렸다고 연락을 해오는 바람에 그 동생을 데리러 가버렸다.
동생 걱정으로 가득 찬 미토베의 표정을 보고 차마 우산을 씌워달라고 할 수 없었던 코가네이는 결국 비가 주춤하길 기다리며 이렇게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교무실이나 부실에 누군가 잊고 돌아간 우산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떠오른 코가네이는 우선 교무실로 향했다. 부실 열쇠를 가지러 가려면 어차피 거쳐야 하는 코스였기 때문에 교무실에 남은 우산이 없었어도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실에도 우산이 없을 경우에는 또 다른 방도를 구해야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코가네이는 열쇠를 꽂아 넣었다. 이미 열려 있는 모양인지 열쇠는 걸리는 부분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누가 먼저 와 있나?”
휴가나 감독일까, 그런 추측을 하며 연 문 안쪽에는 예상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키요시?”
“아, 코가! 뭐 잊은 거라도 있어?”
“아니, 혹시 우산 있을까 싶어서 와 봤어.”
“음, 남은 우산은 이즈키가 와서 가져갔는데.”
“쳇, 선수 뺏겼나.”
코가네이의 어깨가 축 쳐졌다. 자신의 로커를 열고 무언가 찾고 있던 키요시는 로커를 닫고 코가네이에게 다가왔다.
“우산 안 가져왔어?”
“있었는데 망가졌어.”
코가네이가 우산의 명복을 비는 것처럼 두 손을 합장했더니 키요시도 어이쿠, 저런. 하는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코가네이는 자신의 행동을 받아준 키요시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져 가운데에 마련된 벤치에 벌렁 드러누웠다. 얼른 비가 그쳤으면 좋겠는데 창밖은 여전히 강한 빗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냥 맞고 갈까. 어차피 학교도 일찍 끝났는데 얼른 씻고 자면 감기는 안 걸리겠지? 고개를 젖힌, 약간 힘겨워 보이는 자세로 창밖을 보며 저렇게 중얼거리는 코가네이를 내려다보던 키요시가 바닥에 내려놓은 코가네이의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
“나 우산 크니까 같이 쓰고 가자.”
“아무리 큰 우산이라고 해도 키요시한테는 그게 딱 맞을 거 같은데?”
“아, 그럼 파라솔을 가져왔어야 했나?”
농구부원들 중 가장 큰 덩치의 키요시를 아래위로 훑으며 저렇게 말했더니 키요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충격 먹은 표정을 지어서 코가네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씌워준다면 나야 고맙지! 열쇠 얼른 교무실에 두고 올게! 키요시가 가진 건?”
“아, 내 건 비상용 열쇠.”
“그럼 내일 감독한테 반납하면 되겠구나. 그럼 나 얼른 교무실 들렀다 갈 테니까 중앙출입구 앞에서 만나~!”
바로 조금 전까지 가라앉아 있었던 기분이 기포처럼 튀어 올라 평소의 텐션을 찾은 코가네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얼른 교무실로 달려갔다.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었던 것과 교무실까지 맹렬하게 달려간 것까지 합쳐서 짧고 굵게 잔소리를 들었는데도 어쩐지 좋은 기분은 꺼지지 않고 그대로 부풀어 있었다.
중앙출입구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키요시의 뒷모습을 보고 코가네이는 즐거운 듯 웃으며 폴짝 뛰어 그 옆에 섰다. 키요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가네이를 돌아보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코가는 항상 기운차서 보기 좋네.”
“뭐야, 그 말투는. 할아버지 같아.”
“그래?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말투가 옮은 걸지도.”
키요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코가네이가 눈을 깜빡였다. 미토베에게서 느껴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분함과 어른스러워 보이는 분위기는 저런 이유에서였을까. 코가네이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키요시에게 조금 더 붙어 섰다. 키요시가 들고 있던 우산이 팡, 소리를 내며 펴졌다. 매우 튼튼한 느낌이 드는, 커다란 검은 우산이었다.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음을 내딛자 강한 빗줄기가 우산을 내리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생각 이상으로 강렬한 그 소리에 코가네이는 움찔, 키요시에게 더 가까이 다가붙었다. 앞으로 돌려 안은 에나멜 가방은 우산 안으로 들이친 빗방울이 맺혀 축축했다.
코가네이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자기 쪽으로 조금 기운 우산을 보고 키요시를 올려다보았다. 키요시는 코가네이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했다. 코가네이는 자기보다 더 흠뻑 젖어 들어간 키요시의 어깨를 보았다. 코가네이는 말없이 키요시에게 더 다가갔다. 코가네이가 다가선 만큼 조금 물러나려는 키요시의 셔츠를 잡아 만류한 코가네이는 기우뚱한 우산대를 머리로 슬며시 밀었다.
“키요시, 어깨 다 젖었어.”
“아, 그러네. 뭐 이 정도는 괜찮아. 그것보다 내가 우산 너무 높이 들어서 코가가 다 젖으면 안 되니까….”
“쫄딱 안 젖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니까 그렇게까지 챙겨주지 않아도 돼.”
“그래도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으아,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키요시는 말하는 도중 양동이로 들이 붓는 것 같은 양의 비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까지 젖어 짙은 색으로 변한 둘의 교복 바지가 보였다. 이대로 이 비를 뚫고 전철역까지 가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잠시 그런 고민을 하던 키요시는 세찬 비를 향해 손을 뻗는 코가네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키요시?”
코가네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요시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어깨를 안아 당긴 덕분에 더 밀착하게 된 부분이 이상하리만치 뜨겁게 느껴졌다. 어린애 체온 같아. 그런 생각을 하던 키요시는 빙긋 웃으면서 고갯짓을 했다.
“저 앞쪽에 작은 공원이 있거든. 그 안에 작은 정자가 있으니까 비 조금 주춤할 때까지 거기서 비 피하다 가자.”
“어…?”
“혹시 이후에 급한 일 있어?”
“아니, 아냐! 아무 일도 없어!”
“그렇담 다행이다!”
해맑게 웃는 키요시의 얼굴을 보고 코가네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키요시에게 이끌려 조용한 공원으로 들어섰다. 저런 얼굴을 보고 단둘이 같은 공간에 길게 있기 불편하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언제나 떠들썩한 농구부였기 때문도 있고 코가네이가 원체 미토베와 자주 함께 다녔던 것도 있어서 이렇게 키요시와 단둘이 긴 시간 있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아까는 이 비를 뚫고 얼른 집에 가고 싶어서 같이 우산 쓰고 가자는 말에 좋다고 달려들었지만 지금 새삼 키요시와 둘만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니 미약하게 불편한 기분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키요시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평소에도 자주 대화를 하던 사이가 아니었으니 더 그랬다.
코가네이는 정자에 도착해 아직 젖지 않은 부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얕은 계단에 서서 축축하게 젖은 제 교복 셔츠를 털고 있는 키요시를 바라보았다. 미토베보다도 큰 키 덕분에 자연스럽게 한껏 젖히게 된 고개가 뻐근하게 아팠다.
“키요시는 뭘 먹고 그렇게 컸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별 영양가 없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왔다. 시원한 소리를 내며 귓가에 울려 퍼지는 빗소리만으론 이 침묵을 조금 견디기 힘들었던 탓이 컸다. 키요시는 코가네이의 질문을 듣고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코가네이가 손짓을 하기 전에 털썩, 코가네이 옆에 앉은 키요시는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내려 뒷목을 쓸었다.
“그러게, 그냥 평범하게 할머니가 챙겨주시는 밥만 먹었는데….”
“우와,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완전 잘 챙겨주시나 보다!”
코가네이의 말에 키요시는 배시시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낮게 읊조리는 키요시의 말에서 약간의 쑥스러움을 읽어낸 코가네이는 생각지 못한 그의 모습에 도리어 기분이 튀어 올랐다. 명절이나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만 겨우 할머니를 보는 코가네이로서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챙겨준다는 느낌이 어떨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떤 느낌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너무 파고들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아직 키요시와의 거리를 제대로 잡지 못해 말을 아끼게 된 코가네이는 끙,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모아 세운 무릎에 턱을 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키요시가 자신의 무릎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중학교 끝나갈 무렵에 단숨에 확 커버렸어. 그때 무릎이 너무 아파서….”
“우와, 성장통! 말로만 들어봤는데! 지금은 괜찮아?”
“응, 지금은 그렇게 아프진 않아.”
“완전히 안 아픈 것도 아니라는 말이네? 더 클 게 남았어? 키요시 지금 키 몇이야?”
“음 저번 달 신체검사 때 쟀을 때 189cm였던가….”
얼마 되지 않은 신체검사 때를 떠올리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는 키요시를 보고 코가네이는 입을 떡 벌렸다.
“대단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190 넘을 수도 있겠네?! 짱이야, 나 190 넘는 사람 보는 거 처음인데!”
“아, 아니 아직 190 안 됐는데.”
“키요시 아직 자라고 있잖아, 그러니까 조만간 190 넘을 거야! 그럴 거 같은 기분이 들어!”
“대단하다, 코가. 그런 거까지 알 수 있는 거야?”
이유도 없이 장담하는 코가네이의 말에 키요시는 정말 놀란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 코가네이는 스트레칭 하는 것처럼 두 다리를 쭉 뻗고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는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비는 쉬이 잦아들 것 같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자신의 무릎을 콩콩 두드리며 투덜대는 투로 말했다.
“나도 좀 더 크면 좋을 텐데.”
“코가는 키 몇이었는데?”
“말 안 할래.”
“엑, 왜애~?!”
키요시의 어깨가 눈에 보이게 축 가라앉았다. 커다란 덩치의 키요시가 잔뜩 움츠러든 모습을 보니 뭔가 웃기면서도 어쩐지 귀여워 보여서 코가네이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키요시가 답지 않게 입술을 비죽였다. 나는 그대로 말해줬는데.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은, 투정과도 같은 그 한 마디를 들으며 코가네이는 작게 흘리던 웃음을 갈무리해 넣었다.
“내년에 내 키가 조금 더 자라면 그때 말해줄게.”
“코가도 아직 성장기니까 쑥쑥 자랄 거 아냐?”
“그건 또 모르지. 울 아빠도 그렇게 큰 키는 아닌걸.”
그래서 키에 대한 생각은 그리 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테니스부에서 함께 하던 친구들도 그렇고, 코가네이의 주변에 자신의 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올려다보아야 할 인물은 전혀 없었다. 제 또래 중 키가 커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미토베가 처음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그런 미토베도 키요시만큼 고개를 젖혀야 하는 키는 아니었다.
코가네이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키요시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 떨어져 않았다. 평소엔 그리 강하게 느끼지 못했던 열등감이 스리슬쩍 고개를 들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방금까지 키요시의 키를 듣고 들뜬 기분이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코가네이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튀어 오르는 빗방울들을 지켜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농구하면 키 큰다는 설이 있으니까 내년엔 기대해보려고.”
“맞아, 내가 이렇게 큰 이유도 분명 농구 덕분일 거야!”
그러니까 코가도 내년엔 쑥 자라있을 거야. 확신을 담아 말하는 키요시의 말에 코가네이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긍정과 희망을 담고 있는 대답이 바로 돌아오니 어쩐지 가볍게 말을 꺼낸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마치 키가 큰다는 이유만으로만 농구를 하는 거냐고 부드럽게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키요시의 말에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데도 무의식중에 또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사람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드는 이 세찬 비의 탓일지도 몰랐다.
코가네이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다시 다물고는 시선을 멀리 돌렸다. 바로 직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키요시와의 대화가 갑자기 거북스러워졌다. 자신이 방금 토해내려 했던 말이 부끄러웠던 걸지도 몰랐다. 올곧은 키요시에게 제 약한 속내를 내비쳐도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른 부원들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미토베나 같은 초보자 신세인 츠치다에게 털어놓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도리어 기분을 다잡을 생각으로 푸념처럼 늘어놓기도 했었다. 얼마 전까지 자연스럽게 튀어 나오던 그 말이 키요시의 옆에서는 어째서인지 잘 나오지 않았다.
“코가?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아, 설마 내가 괜히 키 얘기해서 우울해진 거야?”
“아, 아냐아냐! 애초에 키 얘기 꺼낸 거 나였구…. 그냥…….”
“그냥…?”
말을 흐리는 코가네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겠다는 것처럼 키요시가 코가네이의 마지막 말을 따라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덩치 커다란 어린 아이 같아서 코가네이는 작게 웃었다. 아까보다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바로 몇 분전까지 키요시가 자신의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무서워했던 주제에, 지금은 키요시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조금 기대가 됐다. 키요시라면 분명 남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여줄 거라는, 그런 기대감. 코가네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 농구부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뭐?”
키요시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코가네이는 머쓱하게 웃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해. 물론 연습은 무진장 힘들고 공은 여전히 잘 안 들어가고 그렇지만. 미토베에게 수없이 했던 말을 꺼내면서 코가네이는 슬쩍 키요시의 눈치를 살폈다. 키요시는 진지한 표정으로 코가네이의 말을 경청하고 있을 뿐 쉬이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 강한 시선에 이끌리는 것처럼 코가네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시합에서 이기니까 그게 즐거워서 괜찮은데…그래도 역시 내가 이제 막 농구 시작한 초짜니까 너나 다른 애들 발목만 붙잡는 거 아닌가 싶어서….”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농구 시작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실력 엄청 늘었고…나도 지금까지 코가한테 도움 많이 받았는걸.”
“에이, 그렇게 내 기분 맞춰줄 필요 없어. 나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실수하고 좋은 기회 잔뜩 날려버렸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생각 이상으로 진지한 키요시의 태도에 도리어 당황하고 만 코가네이가 얼른 양손을 내저었다. 그런 코가네이의 행동에도 키요시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약한 소리를 하면 부드럽게 달래주던 미토베나 츠치다의 반응과는 사뭇 다른 무게감에 코가네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거기에 그…뭐야, 농구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얼마 전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응? 무슨 소리?”
“그, 있었잖아. 골밑의 사령탑이 되면 된다고 했던…. 나중에 이즈키가 다시 설명해 줬는데 진짜 내가 뭘 몰랐던 거더라구.”
자신이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를 했던 건지 이제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코가네이가 작은 몸을 더욱 웅크리며 민망한 듯 혀를 내밀어 보였다.
“그게 그렇게 말이 안 되나?”
“어?”
“나한테는 그 말이 도리어 벽을 무너뜨려주는 느낌이었는데. 벽 너머에 있던 코가니까 할 수 있었던 말이라고 생각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신을 일깨워주려 한다는 감정만은 절절하게 느껴져서 코가네이는 얼빠진 얼굴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요시는 그때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그 큰 손으로 코가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코가한테 무척 감사하고 있어.”
“에이, 내 기분 풀어주려고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까진….”
“정말인데…. 그럼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보여주면 되나?”
“어, 뭐, 뭐를?”
“골밑의 사령탑.”
커다란 장난을 계획하는 어린 아이처럼 웃는 키요시에게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코가네이는 뻣뻣한 고개를 움직여 수긍했다. 포지션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어서 이즈키와 휴가의 말만 듣고 적절하게 만들어낸 말이 키요시는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그저 가볍게 던진 말을 남들과 달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준 키요시가 조금 대단하게 느껴졌다. 코가네이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키요시의 말이 기쁘면서도 순수하게 그 기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키요시의 대단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와 스스로를 비교해버리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반대로 일어났을 때 자신은 과연 키요시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코가네이는 열등감으로 점철되어 있던 중학교, 테니스 부 시절을 회상하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코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 키요시에게 코가네이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웃어 보였다. 마주 미소 짓는 키요시의 표정이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체격만 큰 게 아니라 생각도, 마음도 다 크구나, 키요시는.
그렇다면 옹졸한 자신까지 온전히 품어줄 수 있지 않을까. 코가네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은근슬쩍 키요시에게 붙어 앉았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옷이 맞닿았다. 천을 넘어 전해지는 온기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키요시는 코가네이가 추워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는지 팔을 뻗어 코가네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평소라면 끈적거린다고 밀어냈을 코가네이건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키요시가 주는 온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코가네이는 키요시의 시선을 따라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았다.
비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왕래가 뚝 끊긴 작은 공원 한쪽에 위치한 정자. 그 안에 앉아 있다 보니 현실의 시간에서 약간 동떨어진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 비가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빗줄기는 현실의 공간과 이 공원을 가르는 결계 같은 게 아닐까. 얼마 전 읽은 만화책의 설정 파편을 떠올리며 코가네이는 눈을 반짝였다.
이 공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얼른 비를 피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이런 때가 아니면 자신이 언제 키요시와 이런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드니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빗소리마저 즐겁게 들렸다.
코가네이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에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바라보던 키요시와 눈이 마주쳤다.
“키요시?”
“이렇게 빗속에 갇혀 있으니까 어쩐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거 같네.”
“뭐야, 그렇게 치면 내가 여자 역을 해야 할 거 같잖아.”
“뭐? 왜?”
“그야, 이런 운치 있는 배경에 남자 둘이 있는 게 뭐가 재밌어. 여자랑 두근두근 로맨스를 즐겨야 재밌지. 안 그래?”
“그런가?”
“음, 여자라고 해도 갑자기 생각나는 게 감독인데…. 하하, 안 돼. 괜히 감독한테 혼날라.”
머릿속으로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 장면에 리코를 대입하던 코가네이가 낄낄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운치 있는 배경이라…. 장마 기간은 언제나 습기가 가득하고 공기가 더워지기 시작하는 시기라 짜증난다는 느낌만 가득이었는데,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에 앉아 시원한 빗소리를 듣다보니 확실히 평소와 다른 기분이 들긴 했다. 코가네이는 굵은 빗방울을 받아내느라 쉼 없이 흔들리는 푸른 잎들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이 시기의 운치는 역시 수국일까? 참, 키요시! 수국들 색깔이 왜 다 다른지 알아? 붉은 수국들 밑에는 시체가 있어서 그런 거래! 피를 빨아 들여서 분홍색이나 보라색이 되는 거라는데……!”
얼마 전 부원들끼리 이런 괴담을 얘기하면서 놀다가 리코에게 한 소리를 듣고 때 아닌 과학수업을 받았었지만 코가네이의 입장에서는 그런 과학적인 이유보다는 정말일까, 싶은 이런 괴담의 이유가 더 마음에 들었다.
키요시는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별로 없고 그리 무서워할 것 같지도 않았지만 산성이니 염기성이니 하는 이야기보다는 분위기를 바꾸기에 좋지 않을까 싶어 얘기해 봤다.
키요시는 예상대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코가네이를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래? 벚꽃 같네. 둘이 친구일까. 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러게, 생각해보면 둘이 조금 닮은 거 같으니까 가족일지도 모르겠다! 음, 벚꽃이 봄에 피니까 형일까?”
“수국이 벚꽃이 태어나기 전 여름에 태어났을 수도 있지 않아?”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다른 부원들이―그 중에서도 휴가가―있었다면 분명히 크게 한 소리를 했을 법한 영양가 없는 대화를 길게 이어가면서 코가네이는 팔을 앞으로 뻗어 기지개를 쭉 폈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조금 약해졌는지 귓가에 시원하게 울리던 빗소리가 살짝 줄어들었다. 코가네이는 키요시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수국 한번 보고 싶다. 올해는 아직 못 봤는데.”
“음, 정자 뒤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수국이 많이 피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말?! 지금쯤이면 폈을까? 있지, 키요시~지금 비 조금 주춤한 거 같은데 수국 보러 갈래?”
비가 주춤하면 집으로 가야한다는 사실보다 지금 당장 수국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진 코가네이가 활짝 웃으며 키요시의 팔을 잡아끌었다. 키요시는 말없이 웃으며 일어나 우산을 폈다. 공원에 들어오기 전보다는 조금 더 익숙하고 편한 마음으로 키요시 옆에 선 코가네이는 커다란 물웅덩이를 피해 키요시에게 바짝 다가붙으며 물었다.
“키요시는 수국 좋아해?”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그러는 코가는?”
“음, 좋아하냐, 싫어하냐 물어본다면 좋아한다 쪽일까. 키요시는?”
코가네이의 물음에 키요시는 잠시 말없이 앞만 응시하고 있다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코가네이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잘 모르겠어.”
무슨 대답이 그러냐고 받아치려던 코가네이는 처음 보는 키요시의 표정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비슷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이 이상 접근하면 키요시가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을 흘리는 키요시는 잘 상상이 안 가지만.
수국이 피어있는 장소는 매우 가까웠다. 우거진 나무 뒤쪽으로 자신들이 있던 정자가 그대로 다 보이는 곳이었다. 정자에 있을 때는 뒤편에 수국이 이렇게까지 흐드러지게 피었을 거라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많이 피어있는 수국들을 보고 코가네이는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키요시! 수국이 한 가득이야! 짱이다!”
“하하, 그러게. 아직 일러서 얼마 안 피었을 줄 알았는데.”
“나 이렇게 잔뜩 피어있는 거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야.”
코가네이는 수국 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굵은 빗방울들이 꽃잎과 잎사귀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수국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코가네이는 물방울들이 고여 위태로워 보이는 수국을 기울여 물기를 털어내고는 조심스럽게 그 부드러운 꽃잎을 만져보았다. 자신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대로 짓이겨질 것처럼 연약하게 느껴지는 꽃들이 한 데 뭉쳐 이 세찬 비를 받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떼어놓고 보면 되게 약해 보이는데….”
“응? 뭐가?”
“수국 말이야. 이렇게 따로 떼어놓고 보면 다른 꽃들보다도 힘이 없어 보이잖아.”
코가네이는 홀로 떨어져 빗물 속에 떠 있던 수국 송이를 들어 보였다. 탐스러운 수국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그 작은 한 송이는 매우 애처롭게 보였다. 코가네이는 잎사귀에 떨어져 있는 깨끗한 수국 꽃을 찾아 키요시에게 내밀었다. 키요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 푸른 꽃을 받아들었다. 커다란 키요시의 손에 들린 수국은 코가네이의 손에 있는 꽃보다도 훨씬 작아 보여서 코가네이는 작게 웃었다.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데 말이지…. 뭉쳐 있으면 이런 세찬 비에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꽤 강해지잖아? 그게 참 대단한 거 같아서!”
“그러게, 대단하네.”
“그치?”
“수국도 그렇지만 코가도.”
“엑,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참 대단한 거 같아.”
키요시는 부드럽게 웃으며 코가네이에게서 받은 수국을 소중히 들고 바라보았다. 진실함이 가득 담긴 그 부드러운 시선에 코가네이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저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진심을 다해 다른 사람을 칭찬할 수 있는 키요시가 더 대단한 게 아닐까.
자신이 건넨 수국을 소중히 들고 바라보는 키요시를 계속 쳐다보고 있기 머쓱해진 코가네이는 다시 수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짙은 녹색으로 물든 잎사귀 사이로 비를 피하고 있는 달팽이와 개구리가 보였다.
“아! 키요시~달팽이랑 개구리 발, 겨어언! 으악!”
“코가!”
달팽이와 개구리를 잡기 위해 손을 뻗던 코가네이는 앞으로 한 발짝 내밀었던 자신의 오른발이 진흙에 미끄러져 뒤로 죽 밀려나는 감각을, 마치 슬로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리게 느꼈다.
자신의 얼굴과 팔에 내리치는 빗방울이 알알이 부서지는 광경까지 고스란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다급하게 제 왼팔을 잡은 키요시의, 커다란 손의 감촉이 무척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그 강하고 뜨거운 촉감에 전신이 타오를 것만 같았다.
시간이 조금 멈추지 않았을까 싶었던 순간이었다. 귓가에 기분 좋게 울리던 빗소리마저 멈추고 오감을 자극하는 것은 자신의 팔을 잡은 키요시의 온기와 전신을 감싸는 것 같은 수국향이 전부인 그런 순간.
코가네이는 온몸에 담뿍 스며들 것 같은 수국 향을 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나 코가네이의 감각을 사로잡은 것은 기대하던 수국의 향이 아니라 시원한 비의 감촉이었다.
코가네이는 키요시에게 붙들려 위태로운 자세로 수국들 사이에 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바로 했다. 진흙에 미끄러진 오른발이 흙투성이가 된 것을 빼면, 우산의 가호를 받지 못해 쫄딱 젖어버린 것을 빼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코가네이는 자신이 바로 섰는데도 놓지 않는 키요시의 손을 다른 쪽 손으로 토닥이면서 웃었다. 코가네이를 잡으면서 우산을 놓쳐버린 모양인지 키요시도 코가네이처럼 잔뜩 젖어 있었다.
그런 키요시의 모습을 알아차린 코가네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키요시의 팔을 끌고 정자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돌아와 아침 연습 때 챙겨왔던 수건으로 대충 머리와 상반신을 털어낸 코가네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키요시의 등을 주먹으로 툭 쳤다.
“아까 잡아줘서 고마워, 키요시. 하마터면 진흙투성이가 될 뻔했는데.”
“고맙긴. 아무튼 코가가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키요시는 해맑게 웃으며 자신이 쓰던 수건으로 코가네이의 머리를 문질러주었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느낌이 어쩐지 생소하게 느껴져서 코가네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코가, 몸에서 수국 냄새 나는 거 같아.”
“아까 수국 사이에 있어서 그런가?”
코가네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제 팔의 냄새를 맡았다. 옅은 비의 냄새와 땀 냄새만 나는 것 같았다. 키요시에겐 수국향이 느껴지는 걸까. 코가네이는 아까 아주 잠시 잠깐, 제 온 감각을 사로잡았던 향기를 떠올렸다.
언젠가 다시 맡을 수 있을까.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경험에 기분이 들뜰 만한데도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느낌이었다. 함께 있는 사람이 키요시라 그런 걸지도.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머리를 스쳤다.
코가네이는 아직도 자신의 향을 맡으려는 것처럼 몸을 굽히고 있는 키요시의 몸을 밀어내며 머리를 털었다. 머리칼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어지러이 튀었다. 코가네이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키요시의 머리를 털어주려다가 혀를 차고는 잔뜩 젖은 상의를 털어주었다.
“앉을까?”
“앉아도 머리는 안 털어줄 거야.”
“너무해.”
“키요시 키가 더 너무해.”
키요시는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코가네이의 말에도 뭐가 좋은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에 이끌리는 것처럼 코가네이도 웃음을 터뜨렸다. 비를 피하기 위해 함께 하고선 둘 다 함빡 젖어버렸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키요시는 안쪽까지 젖어버린 우산을 펴 정자 가운데에 두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우산이 마를 때까지는 또 잠시간 정자의 신세를 져야 할 터였다. 코가네이는 이제 자연스럽게 키요시 옆에 앉아서 손장난을 했다. 키요시는 주머니에 고이 넣어놓은 수국 꽃송이를 꺼내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생일 선물을 받았네.”
“어? 키요시, 생일 언젠데?”
작게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그 빗소리 속에서도 용케 알아들었는지 코가네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요시를 올려다보았다. 키요시는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오늘.”
“오―늘?!”
코가네이는 매우 당황해서 키요시에게 더 바짝 다가붙었다.
“왜 말 안 했어?!”
약간 서운하다는 음색으로 묻자 키요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이 나이에 나서서 생일 축하해 달라고 하기 조금 부끄러워서.”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누가 물어보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서서 축하해 달라고 할 건데.”
“그러는 코가 생일은 언젠데?”
“내 생일 가까워지면 알려주지~”
“치사해.”
키요시가 답지 않게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코가네이는 반격이 성공한 아이처럼 웃으며 키요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요시의 시선이 의아함을 품고 코가네이에게 향했다.
“키요시!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어?”
“응?”
“생일 선물~뭐 필요한 거 있어? 농구 물품이라거나, 학용품? 너무 비싼 건 좀 봐주라.”
“아냐, 괜찮아! 난 이미 받았는걸.”
키요시는 휴가가 얼빠진 웃음이라고 칭하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수국 송이를 들어보였다. 코가네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키요시는 단호한 코가네이의 표정에 흠칫 어깨를 떨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아직 마음은 굽히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연 입에서는 미약함을 담은 거절의 말이 흘러나왔다.
“정말, 나한텐 이걸로 충분해.”
“내가 안 충분해. 내가 생일 선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키요시한테 주고 싶은걸. 소중한 날이니까 조금은 욕심 부려도 좋잖아. 아! 다시금 말하지만 너무 비싼 건…봐주세요.”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은 키요시의 태도에 코가네이는 조금 화가 난 것처럼 강하게 말을 하다가 마지막에 약간 힘을 뺐다. 키요시의 표정이 지금 어떤 기분을 품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너무 몰아붙인 걸까. 뒤늦게 조금 후회가 됐지만 코가네이는 자신이 뱉은 말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키요시에게 해주고 싶은 말 그대로였기 때문에 그 말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숨을 죽이고 키요시의 모습을 살폈다.
잠시 말없이 수국만 내려다보고 있던 키요시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자주 보던 표정이건만 어쩐지 키요시를 휘감고 있는 분위기가 낯설어서 코가네이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조용히 키요시의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그러면 내년 내 생일에도, 이렇게 둘이서 같이 수국 보자.”
“뭐?”
“꼭 이 공원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단둘이 수국 보지 않을래?”
키요시의 손이 코가네이의 손을 찾아 강하게 붙잡았다. 손을 잡는 감촉 뿐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키요시의 시선도 너무나 뜨거워서 코가네이는 그게 뭐냐고 말하려던 입을 달싹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색한 수긍에도 무엇이 그리 기쁜지 키요시는 정말 환하게 웃으며 코가네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수국 밭에 반쯤 파묻히면서 옷자락 사이에 걸려있던 건지 어디선가 수국 한 송이가 살포시 정자 바닥으로 떨어졌다. 코가네이는 그 수국을 집어 들어서 키요시처럼 만지작거렸다. 비에 함빡 젖은 수국이 가냘프게 떨렸다.
코가네이는 공기 중에 가득한 습기처럼 축축하게 가라앉는 이 미묘한 기분을 어찌 해야 할 줄 몰라 고개를 떨궜다. 저런 아무것도 아닌 일만으로도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걸까. 생일 선물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것만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자신이 속물적으로 느껴져서 코가네이는 기분이 조금 씁쓸해졌다.
역시 키요시는 나와 다르게 큰 사람이구나.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르는 깨달음을 수국과 같이 소중히 갈무리 해 넣은 코가네이는 이제 슬슬 가도 될 것 같다는 키요시의 말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는 맞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전철역에 도착하자마자 코가네이는 우산에서 쪼르르 달려 전철역 지붕 안으로 들어갔다. 키요시는 우산을 접지 않고 입구에 그대로 선 채 손을 흔들었다. 그런 키요시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던 코가네이는 뒤돌아 가는 키요시의 뒷모습을 보다가 크게 소리쳤다.
“키요시~!”
키요시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의 시선도 코가네이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어깨에 얹고 당당하게 가슴을 편 코가네이는 양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생일 축하해~! 조심히 가!”
약간 늦은 생일 축하 인사를 외쳐 전하고 코가네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키요시가 눈을 깜빡이다가 쑥스러운 듯 웃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키요시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던 코가네이는 흐뭇한 마음을 안고 전철을 탔다. 가방 안에 넣어놔서 무사한 핸드폰으로 키요시를 제외한 세이린 농구부 전원에게 메일을 날린 코가네이는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답장을 확인하며 웃었다.
겨우 집에 도착한 코가네이는 뒤늦게 드는 한기에 서둘러 목욕을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따뜻한 물로 비를 씻어내고 난 뒤라 그런지 이제야 제 몸에서 수국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비의 향에 가려져 있던 걸까. 코가네이는 기념 삼아 가져온 수국 한 송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코가에게서 수국향이 난다 하던 키요시를 떠올렸다.
내일, 잘 되면 좋을 텐데. 갑작스럽게 계획한 일이 잘 풀릴까 싶어 걱정하던 코가네이는 들고 있던 수국을 코에 대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고작 한 송이에서 무슨 향이 날까 싶었지만 은은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코가네이는 수국이 잘 보이도록 협탁 위에 두고 일찍 잠이 들었다.
꿈에서 어쩐지 수국 사이에 있는 키요시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하루 지났지만 생일 축하해, 키요시~!”
이른 아침 연습, 그 시작보다 더 빨리 모여 급하게 준비한 깜짝 생일 파티는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하루 늦었지만 모두 진심을 다해 키요시를 축하해 주기 위해 준비했다. 부실에 들어서자마자 부원들 전원의 폭죽 세례를 맞고 축하노래 합창을 들은 키요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놓고 키요시에게 뭐라 하는 휴가와 말리는 척하면서 새로 생각한 말장난을 날리는 이즈키. 평소와 같은 아수라장을 한 발짝 떨어져서 느긋하게 감상하던 코가네이는 케이크 조각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온 리코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이것저것 준비해줘서 고마워, 감독.”
“뭘, 난 각자에게 할 일을 나눠준 것뿐인걸. 케이크랑 간식은 츠치다 군이랑 미토베 군이 준비하고 장식은 이즈키 군, 선물은 휴가 군이었잖아.”
거기에 꾸미는 건 다 같이 한 거고. 리코는 살풋 웃으며 포크와 케이크 접시를 코가네이에게 건네주었다. 코가네이는 감사히 그 접시를 받고는 생크림 위에 먹음직스럽게 놓인 딸기를 포크로 집어 리코에게 내밀었다. 리코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코가네이는 작게 속삭였다.
“내가 제일 처음 이 파티 구상한 거 키요시한테는 비밀로 해주라.”
“왜? 어차피 키요시 군도 대충 다 알 텐데.”
“음, 그냥.”
“부끄러워서?”
귀여운 아이를 어르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리코에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혀를 내민 코가네이는 어디선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가 키요시와 눈이 마주쳤다. 키요시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코가네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코가네이는 얼른 모르는 척 리코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부탁할게, 감독.”
다시금 작게 속삭인 목소리에 리코는 순순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가네이가 내민 딸기를 감사히 받아먹었다. 코가네이는 자신을 따라붙는 키요시의 시선을 피해 미토베 옆으로 자리를 옮긴 뒤 천천히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제일 맛있는 부분을 감독에게 줘버렸지만 그 아래 남은 생크림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었다.
왜 파티 주최에 대한 화제를 키요시와 대화하기 꺼리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부원들 모두 키요시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걸 키요시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코가네이는 생일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서운함을 그대로 키요시에게 드러내는 휴가와 난처한 표정으로 그런 휴가의 서운함을 받아내고 있는 키요시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미토베가 슬그머니 손수건을 건넸다. 코가네이는 익숙하게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닦으면서 키득댔다.
“응, 키요시가 기뻐하는 거 같아 다행이다.”
누구도 듣지 못한 미토베의 말에 자연스럽게 대꾸한 코가네이는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이 기회에 이미 생일 지난 사람들도 다 축하하자~! 1월부터 5월까지 생일이었던 사~람!”
코가네이의 말에 잠시 눈치를 보던 사람들 중 리코가 먼저 손을 들었다. 리코는 자연스럽게 휴가의 손도 들어주었고 그 둘의 행보에 츠치다도 머쓱하게 손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리코는 연습시간이 줄어든다고 투덜댔지만 그래도 즐겁게 웃으며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모조리 먹은 다음 아침 연습을 시작했다.
끈질기게 자신을 바라보는 키요시의 시선을, 코가네이는 끝끝내 모르는 척하고 또 다시 리코에게 달려갔다.
2.
코가네이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접하고 잠시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분명 저번 주까지는 저러지 않았는데. 코가네이는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자기뿐인가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로커를 연 상태로 굳어버린 이즈키와 휴가가 보였다. 츠치다와 미토베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건, 아니 그 사람이 평소와 달라서 지금 부실 분위기가 이렇게 됐으니 이 말은 적절하지 않겠다. 아무튼, 지금 이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 당사자인 리코는 키요시에게 무언가 전달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부실 문을 닫았다.
탕,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뻣뻣한 움직임으로 갈아입을 옷을 꺼내던 이즈키가 그 소리에도 풀려나지 못한 휴가를 보고 조용히 코가네이와 눈을 마주쳤다.
대놓고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휴가가 감독인 리코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어느 순간 눈치채고 있었다. 리코도 휴가를 내심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조용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뭐지? 코가네이는 자신만큼이나 주변을 신경 쓰는 이즈키의 시선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고는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면서 아까의 상황을 다시금 떠올렸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이제 한 경기만 이기면 결승리그에 올라가는 만큼 다들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남학생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부실에 노크도 없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리코도, 그 모습에 놀라면서 한 소리를 하는 휴가도 평소와 같았다. 전과 같지 않은 것은 그 다음에 나온 한 마디였다.
‘텟페이, 잠깐 나 좀 봐.’
그 한 마디에 키요시를 제외한 전원이 굳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작 키요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리코에게 다가갔다. 농구부원 전원을 비롯해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제 아버지가 운영하는 스포츠센터의 회원이었던지라 조금 더 친근하게 느끼는 휴가마저도 ‘휴가 군’이라고, 꼭 ‘군’을 붙여 부르던 그 리코가, 키요시를 ‘텟페이’라고 부른 것이다.
다들 말하고 싶은 것이 잔뜩 있어 보였지만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리코와 대화를 하느라 제일 늦게 옷을 갈아입은 키요시가 아직 로커 앞에서 굳어 있는 휴가를 툭 건드려 깨웠다. 휴가는 꼬리를 밟힌 아기 고양이처럼 파드득 몸을 움츠렸다가 어색하게 웃고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제일 먼저 부실을 나섰다. 팔과 다리가 같이 나가는 안쓰러운 움직임에 코가네이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휴가, 왜 저래?”
“오늘은 주장님 그냥 가만히 두는 게 좋겠다. 괜히 옆에 가지 마.”
“어, 그럼 코가 나랑 스트레칭 조 짤래?”
평소 기초 연습을 함께 하는 미토베를 흘깃 보니 그는 조용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가네이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 것처럼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키요시를 올려다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중요한 시합이 이제 코앞인데, 공격과 수비의 큰 축인 둘의 사이가 틀어지면 어떡하지? 감독과 키요시의 달라진 관계는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코가네이는 짧은 순간 동안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휘저어 놓은 문제들을 잠시 한쪽으로 치워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연습은 그 정도로 가혹했다.
“그럼 텟페이, 이따 점심시간에 봐.”
“응, 이따 봐, 리코.”
연습이 끝나고 교실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쐐기를 박는 두 사람을 보고 코가네이는 자연스럽게 다시 휴가를 보았다. 휴가는 그 연습시간만으로 번뇌를 털어낸 건지 아까보다는 한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둘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휴가의 상태가 매우 신경 쓰였지만 코가네이는 차마 괜찮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다들 암묵적으로 휴가의 감정을 모르는 척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즈키도 그런 휴가의 모습이 걸리는지 평소보다 말장난 빈도가 매우 줄었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교실로 돌아오는 길 주위에 농구부원이 없는 것을 확인한 코가네이는 혼잣말을 하듯 미토베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미토베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우리 멋대로 판단하면 둘에게 실례겠지? 코가네이는 남들은 알지 못하는 미토베의 의견을 캐치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이 작은 변화는 농구부에서만 이슈가 될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가십거리를 떠들기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둘의 변화가 포착되었는지 점심시간이 되자 여학생들 무리는 이미 그 이야기로 속삭이기 바빴다.
원래 남들과 놀기 좋아하는 활발한 성격이기도 하고 미토베의 말을 전달해주는 역할로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말을 섞으며 지냈던 코가네이에게 여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약간 뇌물의 성격으로 보이는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코가네이의 책상에 올려놓은 여자애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코가네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둘이 사귄대?”
“응?”
“키요시 군이랑 아이다 씨. 친근하게 이름 부르는 걸로 모자라서 지금 단둘이 점심 먹고 있다는 거 같은데.”
그런 정보까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걸까. 무서운 여학생 통신망. 코가네이는 자신을 휘감는 압박감에 음료수로 뻗었던 손을 조용히 거둬들였다. 잘못 마셨다가는 그녀들의 손아귀에 그대로 잡혀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가네이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필사적으로 웃었다.
“그을쎄, 난 잘 모르겠는데. 둘한테 물어보면?”
“코가네이 군도 참, 둘이랑 친하지도 않은 우리가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보겠어, 안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지!”
쾅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강한 힘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소녀의 박력에 코가네이는 찔끔하며 그녀의 뒤에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미토베에게 도와달라는 애원을 가득 담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시선도 어느새 다가온 여학생들에게 차단되어 버렸다.
이 애들이 자신의 책상에 뇌물을 하나둘 올려놓을 때 눈치껏 자리를 피했어야 했는데. 코가네이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들이 원하는 바는 알지만 그래도 순순히 그러겠다 하기 싫어서 코가네이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까딱였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고.”
“둘이 사귀는 사이인지, 만약 그렇다면 고백은 어느 쪽에서 먼저 했는지 알아봐 줘.”
생각 이상으로 거침없는 요구에 코가네이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코가네이가 자신들의 부탁―의 탈을 쓴 강제적인 요구―을 거절할 리 없다 여겼는지 코가네이의 정면에 서 있던 여학생이 생긋 미소 지었다. 최대한 자신의 귀여움을 어필하려는 자태였다.
“응?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네가 이렇게 부탁하는 게 대체 뭔데. 코가네이는 잠자코 있다가 그녀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는 틀렸다 판단하고는 책상에 놓인 딸기우유를 뜯어 마셨다. 자신들이 부탁을 하며 선물한 음식에 코가네이가 드디어 손을 대서인지 그녀들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이런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그래봤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연애하는 이야기인데.
코가네이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작게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사귀는지 아닌지만 물어볼게. 뒤는 물어보기 좀 그렇잖아.”
“에이, 그러지 말고~뒤가 더 중요한 거란 말이야.”
“음, 그럼 아예 안 물어볼래.”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하는 코가네이의 말에 그녀들은 서로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더니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다. 사귀는지 아닌지는 조금만 기다리면 알아서 얘기가 나올 사안 아닌가? 순순히 물러나는 여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며 책상에 엎어진 코가네이는 이 질문을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갑자기 골머리가 아파왔다.
그 비오는 날 이후로 키요시와 조금 더 친근해진 느낌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이제 안 지 겨우 두 달 반 정도 된 인물일 뿐이었다. 거기에 키요시의 성격도 평범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보니 이런 질문을 어떻게 던져야 기분 나쁘지 않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으응, 괜찮아.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볍고 물어보려고.”
걱정이 잔뜩 담긴 표정으로 빠르게 다가온 미토베에게 힘없이 손을 내저으며 코가네이는 웃었다. 애초에 이런 고민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궁금하니까 물어보는 것뿐이다. 친구 사이에 당연하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불편한 건, 아직 키요시에게 조금의 벽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가볍게 물어보면서 그 벽도, 마저 허물어 버려야지.
코가네이는 다시금 기분을 새로이 하며 여학생들이 두고 간 간식을 뜯어 미토베에게 건넸다. 공산품으로 나오는 미니 바움쿠헨도 꽤 먹을 만한 맛이었다.
* * *
언제 물어볼지 타이밍을 재다가 순식간에 연습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내일 아침 연습 전에 물어봐야 하려나, 미토베를 먼저 보내고 천천히 옷을 갈아입던 코가네이는 굳게 닫힌 키요시의 로커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 강요와도 같았던 부탁을 받아들일 땐 나름 가벼운 마음이었건만 막상 리코와 같이 있는 키요시를 보고, 그의 미소를 본 순간 그 가벼운 마음이 엄청난 속도로 무거워졌다.
물어볼까, 말까. 아직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음의 추를 추스르며 마지막으로 부실을 나온 코가네이는 부실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벽에 부딪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커다란 벽이 당황하며 코가네이와 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으아아, 미안해 코가! 나올 줄 몰랐어. 괜찮아?”
“으으, 키요시? 아직 안 가고 뭐했어?”
“리코가 자기 급한 일 생겨서 먼저 가야 하니 부실 문단속 부탁한다고 그래서 천천히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천천히 올걸 그랬어.”
부딪친 거야 별일이 아닌데 코가네이가 주저앉아버린 덕분에 심각하게 느껴진 모양인지 키요시가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코가네이의 얼굴을 살폈다. 코가네이는 아직 욱신거리는 코를 한번 매만지고는 키요시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깜짝 놀라서 주저앉은 거뿐이니까.”
“정말?”
“정말이지, 그럼. 이 정도로 무너질 코가네이님이 아니라고.”
가슴을 내밀며 오버스럽게 말하는 코가네이의 모습에 키요시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걱정하는 시선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서 뒤늦게 부끄러워진 코가네이는 팔을 크게 휘두르며 화제를 돌렸다.
“아아, 문단속 한다 그랬지? 창문은 내가 잠그고 나왔어. 문만 잠그면 될 거 같아. 얼른 잠그고 같이 가자.”
“같이?”
“어…키요시, 이후에 뭐 일정 있어?”
“아니, 나는 코가가 어디 따로 볼일 있을 줄 알았지. 미토베랑 같이 안 가서.”
“나라고 항상 미토베랑 같이 다니는 거 아니다 뭐.”
코가네이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키요시는 그 특유의 웃음을 흘리며 코가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나 남들보다 훨씬 큰 손이 제 머리를 다 덮는 느낌이 이상했다. 묘하게 안정감이 생긴다고 할까. 평소 친하게 지내는 반 친구들이 이랬다면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외쳤을 텐데, 의아하게도 키요시에겐 그런 기분이 생기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키요시를 올려다보았다. 키요시를 보면 이 낯선 느낌의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싶었지만 더 아리송해지기만 할 뿐 의문이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키요시는 코가네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피고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코가 머리 쓰다듬는 거 기분 좋네.”
“높이가 딱이라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높이도 딱이구나.”
“키요시?!”
긍정을 바라고 던진 농담이 아니건만. 진지하게 제 키를 다시 보고 재차 머리에 손을 얹는 키요시의 행동에 코가네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키요시는 크게 웃으며 물러난 뒤 얼른 문단속을 했다. 코가네이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면서 키요시의 등을 툭툭 쳤다.
처음 키요시를 봤을 때보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금 이 분위기라면 장난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것처럼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코가네이는 키요시가 가방에 잘 챙겨 넣는 열쇠를 보았다. 열쇠고리에는 리코가 좋아할 법한 귀여운 캐릭터가 달려있었다.
코가네이는 결심을 다진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두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넘겼다.
“참, 키요시. 그러고 보니 오늘 감독이랑 서로 이름으로 부르던데.”
“아, 응. 그랬지.”
“갑자기 왜?”
키요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코가네이는 입을 굳게 다문 키요시의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어서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키요시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바닥을 내려다보며 걷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코가도 부르고 싶으면 나 텟페이라고 불러도 돼.”
“엑, 얘기가 왜 그렇게 돼.”
뜬금없는 말에 코가네이는 긴장이 풀린 것처럼 푸흐흐 하고 웃었다. 키요시는 웃는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한 표정이었다. 코가네이는 잠시 앞을 보며 걷다가 반짝 고개를 들어 키요시를 보았다.
“혹시, 감독이랑 사귀는 거야?”
키요시가 쓰게 웃었다. 난처한 미소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키요시는 부끄러운 듯 제 목덜미를 거칠게 문지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기로 했어.”
코가네이는 미처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어어, 하는 얼빠진 반응을 내비치고 말았다. 내심 마음속으로 둘이 사귀는 거 아닐까 예상하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당사자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나오니 생각이상으로 기분이 무척 묘했다. 함께 할 거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두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오늘은 스스로의 감정도 무척 알기 힘든 날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코가네이는 과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렇구나. 역시 그런 거구나!”
“으응.”
키요시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코가네이도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이 느낌이 묘한 건지 아닌 건지도 알 수 없어졌다. 만약 미토베에게도 여자 친구가 생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축하해줄 거 같은데. 그럼 미토베가 만약 감독이랑 사귀면?
코가네이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걸음을 멈췄다. 알 수 없는 기분이 조금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래, 친한 사람들끼리 사귀게 된 적이 처음이라 이런 기분이 드는 걸 거야. 이제야 말끔해졌네. 코가네이는 이제야 해결되었다는 느낌으로 손뼉을 한번 쳤다.
코가? 손뼉 소리에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르는 키요시에게 다급히 뛰어간 코가네이는 친근한 느낌으로 그의 팔을 툭 치고는 배시시 웃었다. 키요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번에 이겨서 꼭 결승리그 가자.”
키요시의 말에 현실로 돌아온 코가네이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파문과 의문은 커다란 시합의 존재 아래 조용히 가라앉았다.
뒤늦게 키요시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코가네이는 메일로도, 그 다음날에도 차마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
3.
결승리그로 가기 위한 마지막 시합의 날이 밝았다.
코가네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이번 시합을 이기면 결승리그라니. 올해 처음으로 농구를 시작한 코가네이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 감각이었다. 부원수가 적어 초심자인 자신과 츠치다 중 어느 누구는 꼭 출전을 하는데도 이런 성과인 것을 보면 다른 멤버들의 실력이 무척이나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번엔 발목잡지 않게 더 열심히 해야지. 코가네이는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슛을 떠올리며 결의를 다졌다. 옆에서 대화하는 리코와 키요시의 목소리가 함성소리와 섞여 들렸다. 연습한 적 없는 뭘 해보겠다고 하는 거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역시 농구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들의 대화인 걸까, 아니면 둘이 특별한 관계여서 그런 걸까.
코가네이는 농구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말을 마친 키요시가 그렇지? 하고 동의를 구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멍청하게 반응했는데도 키요시는 무엇이 좋은지 그저 웃었다.
시합이 시작되었다. 여러 의미로 잊을 수 없는 그 시합이.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몰랐다. 키요시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들어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TV화면 밖에서 비극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빠른 속도로 들것이 들어와 그 위에 키요시가 눕혀지는 것을 보고 코가네이는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실려 가는 걸 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친구 중의 한 명이 그 주인공이 되리라곤.
코가네이가 다가가자 키요시는 힘겹게 웃었다. 코가네이는 땀으로 흥건한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분명 방금까지 열띤 경기를 해서 후끈 달아올라 있어야 할 땀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코가네이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미야의 비꼼도 휴가의 분노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 정보만 인식될 뿐 코가네이의 감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코가네이는 조용히 키요시의 곁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무척이나 크게 느낀 존재가 제 아래에 있었다. 현실의 무자비함을 애써 외면하던 심장이 그제야 아파왔다.
시합을 겨우 끝내고 모두와 함께 달려간 병원. 그곳에서 키요시는 보는 사람이 허탈해질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아무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코가네이는 누구보다도 크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시합이 끝난 후 뒤늦게 실감하게 된 키요시의 부상과 부재는 코가네이의 마음에 고요하면서도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자신이 던져 빗나간 공을 잡기 위해 뛰어올랐던 키요시. 그렇게 뛰어올랐다가 크게 다친 키요시. 비명을 지르던. 고통스러워하던. 식은땀을 흘리던. 그러고도 웃어보이던….
코가네이는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조용히 미토베의 옷자락을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말하지 않아도 제 친우의 심정을 알아차린 과묵한 친구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 탓이 아니라 위로해주는 소중한 그 온기를 코가네이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 *
키요시가 빠진 세이린 농구부는 중심축이 무너진 것처럼 결승리그에서 속절없이 연패하고 말았다. 키요시의 역할이 이렇게 컸구나. 아직까지도 각 포지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코가네이는 골밑에서 팀을 받쳐주던 키요시의 중요함을 그제야 피부로 느꼈다. 아직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키요시가 돌아오면 이것저것 많이 물어봐야지. 미토베도 이즈키도 차분하게 가르쳐주긴 하지만 미토베에겐 자신이 너무 응석부리는 면이 있고, 이즈키는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말장난을 무시하고 그 흐름을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친한 츠치다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니 뭐.
이제 겨울에 있을 윈터컵 예선을 준비해야한다는 리코의 말을 듣고 코가네이는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합숙이구나. 합숙, 키요시는 갈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금방 퇴원할 거라 생각해 정확한 퇴원 날짜를 물어보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오지 않는 걸 보니 조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일부러 연락을 하거나 병문안을 가지는 않았다.
코가네이는 바보처럼 웃던 키요시의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너무 안심하고 있었다. 조만간 퇴원해서 또 다시 시합에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리코와 휴가를 비롯한 다른 부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코가네이는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키요시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별 거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 말대로 곧 부실 문을 열고, 특유의 얼빠진 웃음소리를 흘리며 올 거라 믿었다. 그렇지만―.
“있지, 미토베. 키요시 퇴원 언제래? 이제 윈터컵 준비…아, 막 퇴원했으니까 시합은 무리려나?”
키요시의 퇴원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조금씩 불안해질 때쯤, 코가네이는 쉬는 시간을 틈타 미토베에게 가볍게 물어보았다. 수건으로 땀을 닦던 미토베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코가네이의 시선을 피했다. 말수가 적은 만큼 난처한 표정을 많이 짓는 미토베이긴 하지만 평소와는 뭔가 다른 느낌에 코가네이는 일부러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제 안에 피어나는 불안감을 털어내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코가네이는 자신의 말을 들었을 휴가에게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 옆에는 리코도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상 코가네이의 말을 확실히 들었을 두 사람은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코가네이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키요시, 조만간 퇴원한다고, 그랬잖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다가온 츠치다와 이즈키를 돌아보며 말하자 그 두 사람도 움찔 하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코가네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코가네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미토베가 안절부절못하며 코가네이의 주변을 서성였다.
“나만, 모른 거야?”
“코가…그게 아니라.”
“다른 애들은 나랑 감독이 얘기하는 거 듣다가 얼떨결에 알게 된 거야, 딱히 너한테만 숨긴 게 아니라….”
“그렇지만 나만 몰랐던 건 맞잖아.”
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에 어느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분위기가 그 목소리만큼이나 축 가라앉았다. 그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코트 바닥만 보고 있던 코가네이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분전환을 하려는 것처럼 커다란 움직임이었다.
공중을 향해 길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린 코가네이는 빙긋 웃었다.
“뭐,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됐어. 나중에 키요시 퇴원해서 오면 거짓말 한 벌로 햄버거 사라고 하면 되겠지? 아, 나만 얻어먹을 거니까! 다들 달라붙기 없음!”
어린 아이처럼 선언하는 코가네이의 행동에 이즈키와 츠치다가 쓰게 웃으면서도 안도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휴가와 리코는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너무 활발하게 움직이는 코가네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코가에겐 자신이 빨리 퇴원 못 한다는 걸 되도록 말하지 말아달라던 키요시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것 같았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지금 코가네이의 모습을 보면 어렴풋하게 키요시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코가네이는 세수를 하고 오겠다 하고 홀로 수돗가로 나왔다. 차가운 물로 머리를 식히니 키요시의 퇴원이 늦어진다는 사실이 다시금 강하게 머리를 쳤다. 코가네이는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보며 지금까지 키요시와 있었던 일을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함께 우산을 쓰고 수국을 보았던 장마 중 하루. 키요시의 생일이었다. 그때부터 키요시를 전과는 달리 느끼게 되었다. 키요시의 대단함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키요시라는 인물 자체를 확실하게 친구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키요시는 자신이 아무것도 몰라 그저 아무렇게 던진 말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고민해주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코가네이는 잠시 굳었다.
〔정말인데…. 그럼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보여주면 되나?〕
〔어, 뭐, 뭐를?〕
〔골밑의 사령탑.〕
코가네이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리를 시원하게 적신 물줄기가 마치 눈물처럼 눈가를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키리사키와의 시합 전,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리코에게 전하던 키요시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지? 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웃어보이던 키요시의 모습도. 그때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서 멍청하게 반응했는데 자신이 말한 골밑의 사령탑을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니 그날 시합에서는 키요시도 골 주변에서 많은 패스를 주었던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초보자인 코가네이는 작전을 이해하고 한다기 보다는 거의 리코나 휴가의 말을 듣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디에서 누가 패스를 주는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날은 상대방 진영에서 키요시가 준 패스를 받고 조금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그 신기한 기억을, 키요시는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한 걸까.
그렇게 플레이하기 위해서 따로 시간을 내서 연습 했을 텐데. 그렇게 연습해서 다리에 무리가 온 건 아닐까. 그래서 저렇게 길게 입원하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아무렇게 던진 말에 키요시가 부상을 입은 것 같아 코가네이는 온몸이 떨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키요시가 부상을 입기 전 슛을 쏜 사람은 코가네이 자신이었다. 자신이 만약 그 순간, 골을 빗나가게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깔끔하게 넣었다면 키요시가 그렇게 큰 부상을 입고 끝나지 않았겠지.
코가네이는 입을 막고 주저앉았다. 눈가와 뱃속이 뜨겁게 타는 것 같았다. 이래서 키요시는 자신에게 퇴원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은 건 아닐까. 한번 부정적으로 피어나기 시작한 생각은 또 다른 부정적인 가정을 양분으로 삼아 빠르게 피어났다.
마치 그 아래에 검게 썩은 시체라도 있는 것처럼.
물에 흠뻑 젖은 줄도 모르고 터덜터덜 들어온 코가네이를 보고 미토베와 츠치다가 수건을 들고 뛰어왔다. 코가네이는 얼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었다. 너무 더워서―판에 박힌 변명을 뱉는 입가가 조금 떨렸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 믿었다.
그 이후의 연습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갑자기 오른 열에 앓기 시작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다음날,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아 연습을 견학만 하던 코가네이에게 휴가가 다가왔다. 며칠 뒤, 키요시 병문안 갈 건데 갈래? 어렵게 물어보는 휴가에게 조금 웃어 보인 코가네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갈래.”
“그럴래?”
“응, 나중에. 이번엔 너희들끼리 다녀와.”
힘없는 미소의 코가네이를 내려다보던 휴가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그 말없는 배려가 고마워서 코가네이는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남들의 배려에 기대버리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키요시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키요시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물론 키요시라면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강하게 피어나는 불안감을 없앨 수가 없었다.
코가네이는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는 다른 부원들을 바라보았다. 코가네이의 상태와 부원들의 할당량을 체크하기 위해 코가네이 옆에 서서 코트 쪽을 바라보고 있던 리코가 갑자기 툭 말을 걸었다.
“장기 입원 소식,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텟페이가.”
“……갑자기 왜?”
“코가네이 군이 엄청 상심했다고 전했거든.”
“그걸 왜 말해?! 아니, 그 전에 나 그렇게 상심한 거 아니야!”
코가네이는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게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던 걸까. 그냥 조금 서운했던 건데. 그나저나, 말할 거면 나한테 직접 말하지 왜 감독한테 전하게 한 걸까. 아, 하긴 감독은 자주 병문안 가겠구나. 둘이서 많이 얘기 하겠지? 나도 키요시랑 좀 더 많은 얘기를 했다면 좋았을까. 그 비오는 날, 더 중요한 얘기를 잔뜩 할 걸 그랬나. 수국이니, 벚꽃이니 그런 얘기 말고.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 코가네이를 내려다보면서 리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럴 거 같아서 직접 전하라고 했는데. 그 덩치만 큰 소심쟁이는 중요한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평소엔 대단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잘 하면서 이런 이야기는 속으로 끌어안아 버리는 성미에 절로 혀를 차게 된다.
다른 부원들은 평소에 다들 차분한 성격들이라 그 중에서 유독 활발한 코가네이가 분위기 메이커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몸집도 부원들 중 제일 작은 주제에 행동은 크고 다채로워서 아이 같은 면모가 두드러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 코가네이가 키요시의 퇴원 문제로 우울해 하고 이렇게 컨디션난조까지 보인 덕분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다들 내심 코가네이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터하이의 결과가 키요시의 부상과 처참하게 패한 결승리그뿐이어서 다들 속이 쓰릴 텐데도 그 결과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뭐 결과적으론 다행인가. 패배를 너무 끌어안고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리코는 어떤 의미론 냉정하게 결론 내렸다.
코가네이도 이 우울해하는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적절하게 조치를 취해야 할 터다. 리코는 힘없이 내려앉은 코가네이의 어깨를 보면서 들고 있던 노트 한 구석에 코가네이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러는 중 코가네이가 리코를 불렀다. 리코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왜, 몸 더 안 좋아졌어?”
“그게 아니라…있지, 슛 성공률은 많이 연습한 만큼 올라가겠지?”
“…만큼이라고 할 정도로 확실하게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연습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올라가겠지.”
“역시 그렇구나.”
헛된 희망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단호한 리코의 대답에 코가네이는 가뜩이나 힘이 없던 어깨를 더더욱 움츠렸다. 리코는 잠자코 그 어깨를 바라보았다. 힘은 없었지만 포기를 한 어깨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코가네이의 눈은 아까부터 미니시합을 하는 부원들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리코는 희미하게 웃으며 노트에 적어놓았던 코가네이의 이름 위에 선을 몇 개 그어 짙게 덮어버렸다.
* * *
9월이 되어도 더운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도리어 8월의 끝보다도 더운 것 같았다. 코가네이는 제 의욕을 빠르게 없애버린 늦더위를 저주하며 책상에 엎드렸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도 무척이나 귀찮았다. 어차피 이미 쉬는 시간에 간식으로 사온 야키소바빵을 두 개나 해치운 상태다. 점심정도 나중으로 미룬다고 죽지는 않겠지. 코가네이는 시원한, 아니 이미 미지근해진 음료수를 목에 대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도시락을 들고 코가네이의 자리로 온 미토베가 도시락을 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코가네이 앞에 앉았다. 코가네이는 고개만 돌려 힘겹게 미토베를 올려다보았다.
입만 벙긋거려 왜 그러냐고 묻자 미토베가 물끄러미 코가네이를 바라보았다. 코가네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필요한 거? 음, 지금으로썬 내 방에 놓을 에어컨일까. 아하하, 농담이야.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코가네이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토베를 보았다. 미토베는 그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가 허겁지겁 도시락을 열었다. 언제나 맛깔 난 반찬을 자랑하는 미토베의 도시락이 보이자 코가네이의 관심이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입맛이 없는 것처럼 늘어져 있던 주제에 미토베의 계란말이를 하나 얼른 손가락으로 집어먹은 코가네이는 그제야 배가 고파졌는지 주섬주섬 가방에서 제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다. 미토베는 그런 코가네이 몰래 어딘가로 메일을 보냈다.
이번 주의 연습은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차 없는 연습이었다. 인터하이의 패배를 발판으로 삼아 뛰고 있지만 솔직히 코가네이는 농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그렇지만 1학기 때와는 다르게 이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부실로 향하는 다리는 이상하게 무겁지 않았다.
아직 남아있는 더위가 체력을 두 배로 앗아가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가면 기절하듯 자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코가네이는 키요시 병문안을 언제 가면 좋을까 머릿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중간고사 전, 연습이 없는 시기에 갈까, 아니면 중간고사 다 끝내고 갈까.
키요시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극복했지만 묘하게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얼굴을 보는 건 상관이 없는데 부상에 대한 사과를 하기가 무척이나 두려웠다. 그렇지만 여기서 시간이 또 너무 지나버리면 그것도 문제일 것 같고.
코가네이는 그렇게 언제 키요시를 보러가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다 기절하듯 잠에 들곤 했다.
그러다 결국 늦잠을 잤다. 아침 연습 시간에 늦은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일어나던 기상시간보다 30분을 더 자버렸다. 왜 안 깨웠어! 항상 자신이 맞춰놓은 알람보다 먼저 들어와서 저를 깨우던 누나가 그날따라 깨워주지 않았다. 누나인 아카네는 허둥대는 동생을 감상하다가 얄밉게 웃었다.
“우리 신지, 요즘 정신 없나보네?”
“뭔 소리야, 갑자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자, 여기 도시락. 이건 힘내라고 내가 선물로 주는 거고.”
“무겁게 왜 두 개나……으아! 진짜 아슬아슬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 즐기고 와~”
“놀러 가는 거 아니야!”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누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헐레벌떡 집을 나온 코가네이는 전속력으로 전철역을 향해 뛰었다. 이번에 오는 열차를 놓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지각확정이라 아침부터 연습량 2.5배를 소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코가네이는 전신이 싸늘하게 식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재빠르게 개찰구를 통과했다. 학교까지도 달려가면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을 것 같다.
연습 시작 전부터 워밍업 제대로 한 기분이었다. 더워서 윗도리를 벗고 티셔츠만 걸친 채 왔는데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연습 시작 전에 세수하고 오겠다고 휴가한테 말해놔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부실 문을 연 코가네이의 시야가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생일 축하해, 코가~!”
“해피 벌스 데이!”
“어, 어어, 엥?”
“우와, 코가네이 군 표정 봐!”
리코의 말에 다른 부원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떨떨하게 서 있는 코가네이 곁으로 미토베가 다가와 머리에 걸쳐져 있는 폭죽과 꽃가루의 잔해를 치워주었다. 그 행동을, 아직도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눈으로 좇고 있던 코가네이에게 이즈키가 다가왔다.
“자기 생일 까먹고 있는 거 같다고 미토베가 알려주긴 했지만 정말 잊고 있었나 보네?”
들고 있던 케이크에서 생크림을 퍼 코가네이의 콧등과 볼에 발라준 이즈키를 보고 코가네이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나 오늘 생일이었지!”
“생일 근처로 가면 먼저 알려주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야!”
“나였어! 근데 까먹었네!”
TV에 나오는 개그맨처럼 자기 이마를 짝하고 친 코가네이는 해맑게 웃으며 애들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멤버들이 다시 환호를 지르며 남은 꽃가루를 모조리 코가네이에게 쏟아 부었다.
코가네이의 입가에 케이크를 뭉개고 왁자하게 웃던 모두는 마지막으로 한번씩, 꽃가루투성이인 코가네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부실을 나섰다. 그 손길 중에 제 머리를 온전히 다 덮던 커다란 손의 존재는 없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던 리코가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듯 걸음을 돌렸다. 물수건으로 크림이 묻은 입가를 닦고 있던 코가네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코를 쳐다보았다.
“텟페이한테 전해도 되지? 오늘 코가네이 군 생일이라고.”
“어? 그, 그럼 당연하지!”
갑작스러운 말에 자기가 말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코가네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코는 싱긋 웃으면서 부실을 나섰다. 천천히 옷 갈아입고 세수도 하고 와. 생일이라서인지 매우 후한 대접을 해준 감독에게 속으로 감사하면서 코가네이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부실을 나서기 전 확인한 핸드폰에는, 정말 오래간만에 키요시의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생일 축하해, 코가』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너무나 키요시다운 메일에 코가네이는 슬쩍 울상을 지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코가네이는 병원 입구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한동안 오지 않아서인지 남다른 분위기를 감고 있는 커다란 병원 건물이 위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니, 사실은 그 병원 안에 있는 어느 인물 한 명에게 느끼는 감각이겠지만. 코가네이는 연습을 마치고 난 뒤라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키요시의 퇴원이 미뤄진다는 소식을 듣고, 아니 정확히는 제 탓으로 키요시가 다쳤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코가네이는 의식적으로 문병을 가지 않았다. 나중에 혼자, 제 죄책감이 정리되고 키요시를 마주할 용기가 나면 그때 와서 차분히 대화를 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그 중요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코가네이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준 것이 바로 생일날 받은 키요시의 메일이었다. 리코가 알려주자마자 바로 보낸 것 같은 그 메일에 코가네이는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그 커다란 손으로 용케 잘도 쳤네. 꼭 버튼이 두 개씩 눌릴 것 같은 키요시의 손을 떠올리던 코가네이는 며칠에 걸쳐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혼자 끙끙대지 말고 깔끔하게 키요시에게 사과를 하자. 그러면 다시 예전같이 키요시를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아침 연습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와, 그날의 추억을 담고 있는 수국을 말려 만든, 책갈피를 꺼내 돌려보던 코가네이는 그렇게 결심을 굳힌 듯 강한 시선으로 하늘을 보았다. 그날처럼 더운 기운이 가득했지만 그날과 다르게 무척이나 맑고 높은 하늘이었다.
그렇게 며칠에 걸쳐 겨우 결심을 마치고 병원에 들어선 것은 좋았지만 막상 병실 앞에 서니 애써 긁어모았던 용기가 다시 희미하게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병실 문 앞에 서서 여러 번 심호흡을 반복하던 코가네이는 문병 선물로 가져온 과일 바구니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고는 다른 손으로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침대 윗부분을 올려 편히 기대 앉아 있던 키요시가 코가네이를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었다. 원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티 없이 맑은 웃음에 코가네이는 말문이 막혔다.
“코가! 오랜만이네! 저번에, 몸이 안 좋아서 못 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으응! 별거 아니었어. 지금은 완전 쌩쌩해. 키요시는?”
“나도 별다를 거 없지, 뭐. 퇴원이 좀 미뤄진 것만 빼면.”
그 말을 기점으로 둘 사이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키요시는 말을 뱉어내고는 잠시 실언했다는 듯 입을 앙 다물었다가 코가네이의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게. 내가 치료 받던 중에…괜찮은 거 같아서 이리저리 달려 다녀서 그런지 다쳤던 부분이 더 안 좋아졌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거짓말.”
키요시의 말을 끊고 코가네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키요시는 다시 입을 다물고 이불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
“뭐가? 거짓말 한 거?”
“그것도 있고. 미리 말 못한 것도.”
코가네이는 차마 괜찮다고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코가네이의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았는지 키요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코가네이를 바라보았다.
코가네이는 천천히 침대에 더 다가가 이불 아래에 있는 키요시의 무릎에 손을 댔다. 키요시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나야말로 미안해.”
어려워하던 말은 생각보다 쉽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일그러지는 표정을 다잡기는 생각보다 무척 어려웠다. 코가네이는 울상지은 얼굴을 있는 대로 숙이며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키요시가 조금 경악한 것 같은 얼굴로 코가네이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코가야말로 뭐가? 아, 생일 미리 말 안 해준 거?”
코가네이는 작게 숨을 들이 쉬며 고개를 저었다.
“키요시가 다친 거. 그거 나 때문이잖아.”
“뭐?”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둘 다 하면 된다고 얘기하는 바람에……아니 그때 골만 제대로 넣었어도…키요시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거잖아. 그러니까 다 나 때문…!”
“코가!”
낮지만 강한 키요시의 부름에 코가네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떨렸지만, 목과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잔뜩 혼난 것 같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키요시는 조금 화난 표정을 지으며 코가네이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평균 남자아이의 손목인데도 커다란 키요시의 손에 잡히니 어린 아이의 손목처럼 가늘어 보였다. 코가네이는 힘없이 끌려가 죄인처럼 키요시 앞에 섰다.
“코가.”
아까보다는 부드럽지만 그래도 아직 약간의 질책을 담고 있는 음색이 코가네이의 이름을 불렀다. 코가네이는 머뭇머뭇 고개를 들어 단단하게 굳은 키요시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키요시는 코가네이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답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힘 있게 짚어주는 목소리였다. 키요시는 코가네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코가네이의 손을 잡았다. 아직 더운 날씨인데도 코가네이의 손끝은 긴장으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키요시는 그 냉기를 없애려는 것처럼 손끝을 꼭 쥐었다. 키요시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코가 탓이 아니야.”
“그치만….”
“그렇게 치면 내가 내 몸 상태도 모르고 무리해서 연습한 게 문제고, 그때 상대 선수랑 이상하게 부딪친 것도 문제니 다 내가 잘못…….”
“그건 아니야!”
조금 전의 키요시가 그랬던 것처럼 코가네이가 황급히 키요시의 말을 잘랐다. 스스로 자책할 때보다 키요시의 자책을 보는 코가네이의 표정이 더 울상이었다. 툭 건들면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모습에 키요시는 쓰게 웃었다가 얼른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치? 그러니까 누구의 탓도 아닌 걸로.”
코가네이는 입을 다물었다. 휴가가 옆에 있었다면 키리사키 놈들을 떠올리라고 이, 멍청이들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상황이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이 자리에 그렇게 소리쳐줄 휴가가 없었다.
결국 코가네이는 키요시의 설득 아닌 설득에 넘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자신이 웃는 것을 보고 안도한 듯 따라 웃는 키요시를 보고 코가네이는 기운이 빠진 듯 옆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코가네이를 몇 주에 걸쳐 괴롭히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그 해결 이후 약간의 어색함이 남았다. 꼭 쥐고 있던 코가네이의 손을 슬며시 놓고 어색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키요시가 뒤늦게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쳤다.
“맞다, 코가!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뭐야, 뜬금없이. 그때 메일로 축하해줬으면서 왜 또?”
“그래도 직접 소리 내서 전하고 싶은걸.”
“그럼 전화하지 그랬어.”
“아! 리코한테 메일로 전해 들어서 전혀 생각 못 했다.”
정말 생각을 못 했던 건지 완전 충격 받은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본 키요시 덕분에 코가네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성적은 좋으면서 가끔 이렇게 얼빠진 모습을 보여주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아서 그런가. 아니면 키요시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격인 걸까.
코가네이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시무룩하게 있는 키요시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고마워, 키요시!”
그 말에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은 키요시는 코가네이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그래! 나 그때 코가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
“어, 뭐? 언제?!”
“내 생일 파티 해줬을 때.”
“엥? 그때 왜?”
“코가가 하자고 한 거잖아.”
추측도 아니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키요시의 태도에 코가네이는 자연스럽게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래야 할 거 같아서 숨긴 건데. 이제 와서 감사를 받으니 등줄기가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코가네이는 등을 긁으며 딴청을 피웠다.
“내가 먼저 말했어도, 결국 준비한 건 부원들 다 같이 한 거니까…굳이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말하고 싶었는걸. 나, 그렇게 친구들이 파티 해준 게 처음이거든.”
“엑, 진짜로?”
“어렸을 땐 할머니가 준비해주셔서 집으로 몇 명 초대하긴 했는데, 소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할머니도 힘드시니까 그냥 내가 케이크 사들고 가서 저녁에 간단하게 축하하는 게 익숙해졌거든. 생일 아는 친구들이 종종 선물을 주긴 했는데 그렇게 파티까지 한 적은 없어서….”
그래서 진짜 기뻤어. 정말 고마워, 코가. 벌써 몇 달이 지난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아이처럼 웃는 키요시가 귀여워서 코가네이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반은 자기만족으로, 반은 키요시가 기뻐했으면 해서 멋대로 벌인 일인데 당사자인 키요시가 저렇게 좋았다고 하니 매우 다행이었다.
코가네이는 완전히 가벼워진 마음으로 키요시와 마주 보고 웃었다. 그 미소를 보던 키요시는 또 다시 무언가 생각난 듯 화색이 도는 표정을 코가네이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자연스럽게 몸을 움츠리게 된 코가네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코가, 지금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응?”
“코가 생일 때 난 선물 못 챙겨줬잖아. 지금이라도 주고 싶어서.”
“됐어, 괜찮아~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런 거까지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나아서 퇴원하는 거나 생각해.”
“내가, 코가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고 싶어.”
강한 어조로 끊어 말하는 방식이 주는 무게가 어마어마해서 코가네이는 결국 양손을 들어올렸다.
참나, 어디서 그런 멋진 말을 배워온 거야. 투덜대는 코가네이를 보고 키요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코가가 나한테 해준 말이잖아. 코가네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몰라, 몰라. 기억 전혀 안 나니까, 난 그런 말 안 한 거야. 관심 없다는 투로 말을 뱉어내는 코가네이의 태도에 키요시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코가네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나 생각났다.”
“뭔데?!”
시무룩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하게 피어났다. 그 모습을 눈이 부신 듯 잠시 찡그리고 바라보던 코가네이는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키요시와 눈을 맞추다가 시선을 돌렸다. 키요시의 무릎이 있는 위치였다.
“음, 내년 내 생일에―키요시가 다른 부원들하고 같이 내 생일을 축하해줬으면 좋겠어. 농구부 부실에서.”
“……어?”
“그때는 새로 들어온 후배들도 있을 테니까, 무진장 재밌겠다, 그치?”
“어, 맞아. 그렇겠구나. 후배들도 있겠네.”
내년에 대한 생각이 아직 없었는지 얼떨떨하게 반응하는 키요시를 보고 코가네이는 있는 힘껏 웃었다.
“알았지? 내년엔 내 생일 당일에, 만나서 얼굴 보고 축하한다고 해줘야 된다?”
가볍게 던지는 요구에도 쉽사리 대답 하지 못하고 그저 당황으로 굳은 표정의 키요시를 보니 갑자기 속에서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키요시의 부상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더더, 더더더,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내년을 기약하는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 정도로.
코가네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황급히 일어섰다. 타이밍 좋게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코가네이는 튀어나가는 것처럼 열린 문으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뒤에서 간호사가 놀라는 소리와 저를 부르는 키요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코가네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그대로 빠르게 걸어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러겠다는 대답을 거짓말로라도 쉽게 하지 못하던 키요시의 모습과 다급하게 저를 부르던 키요시의 목소리에 코가네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죄책감은 사라졌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또 다시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 코가네이는 뜨거워지는 눈가를 팔로 꾹꾹 눌러가며 천천히 걸었다. 제 가슴과 눈가가 이렇게 뜨거운 건 분명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늦더위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학년이 바뀌고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키요시의 퇴원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4.
다시 6월이 되었다.
올해는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려면 조금 남았는지 잔뜩 흐리고 습기가 가득한 날이 계속 되었다. 코가네이는 기운이 없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는 이의 기분까지 우중충하게 만드는 하늘빛이었다.
비라도 시원하게 내리면 좀 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초코우유를 쪽, 하고 빨아 마신 코가네이는 리코의 뒤에 자리한, 무언가 잔뜩 적힌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키요시 생일 파티 준비 계획>
부원들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다 같이 이렇게 생일파티 준비회의 겸 선물 추천을 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작년 키요시의 생일을 기점으로 하게 되었으니 정말 딱 1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면서 코가네이는 다 마신 우유팩을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회의 소집은 생일 당사자의 눈을 피해 주로 연습이 다 끝난 후에 이루어지곤 했는데 이번은 그 당사자가 학교에 없다보니 맘 편하게 점심시간에 부실에 모이게 되었다. 그것도 2학년들만. 1학년 후배들은 키요시의 존재조차 모르니 당연한 결과였다.
점심을 다 먹고 느긋하게 화이트보드를 보던 휴가가 달력을 흘낏 보고는 보드마커를 들었다. 끼이익 하고 마커와 보드가 마찰하는 소리가 음식 우물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던 부실을 채웠다.
<6월 10일 오후연습 없음>
“이걸로 된 거지?”
“병원이라 폭죽도 못 터뜨리고 장식도 못하니까, 텟페이 씌울 고깔모자랑 케이크, 과일 바구니정도만 돈 모아서 사면 될 거 같아.”
“이번엔 선물 각자 준비하는 걸로?”
“크게 모아서 줘봤자 병실에서 걸리적거리기만 할 거고…소소하게 각자 챙겨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이즈키의 질문에 리코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선물로 줄 만한 것들이 적힌 칠판에는 책이나 음악CD, 보드게임류 등 소소한 물건들만 잔뜩이었다. 병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있는 키요시에게 필요하거나 줄 만한 것들이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리코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단어들의 나열을 훑어보았다.
“키요시가 뭐 필요하다고 말한 건 없고?”
츠치다의 질문에 리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뭔가 받고 싶어 하는 게 있는 건 분명한데 말을 안 해주네. 이번엔 받기 힘들 거라나 뭐라나. 내가 줄 수 있는 건 또 아니래.”
“키요시, 여전히 뭔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구나.”
“여기서 제일 알 수 없는 건 네 말장난이야, 이즈키.”
“엑, 나 아직 말장난 하지도 않았는데, 왜!”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즈키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코가네이는 보드를 바라보았다. 뭘 선물하면 좋을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리코와 눈이 마주쳤다. 리코는 코가네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그저 쓰게 웃었다. 코가네이가 먼저 그 시선을 피해서 미토베에게 고개를 돌렸다.
“감독, 미토베가 먹을 거 선물하는 건 어떻겠냐고 하는데~”
“어머, 그러게. 병실 사람들하고 나눠먹을 수 있는 것도 좋겠다. 텟페이, 도라야키 좋아하니까 어르신들 취향하고 딱이겠네.”
“키요시, 도라야키 좋아해?”
“응, 노인네 입맛이지?”
“아니, 도라에몽 입맛.”
코가네이의 말에 리코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선물 목록 아래에 도라야키를 적어 넣었다. 코가네이는 웃으면서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나! 내가 도라야키 선물로 줄래!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가게 알아!”
“좋아, 그럼 도라야키는 코가네이 군. 나는 환자들도 할 수 있는 스트레칭이랑 근력 트레이닝 관련 책으로 해야겠다.”
“오, 그럼 나는 내 말장난 베스트 셀렉션을 엮어서…!”
“닥쳐, 이즈키.”
시무룩하게 가라앉는 이즈키를 보고 다들 작게 웃었다. 그 후로도 선물에 대한 얘기는 조금 더 이어졌다. 스스로 살 선물을 제일 먼저 결정한 코가네이는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전, 생일날 뭘 갖고 싶냐고, 그냥 예의상 물어본 메일에 키요시는 그냥 다 같이 축하해주러 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답장을 보냈다. 변한 게 없다니까. 씁쓸하게 웃으며 키요시의 답장을 다시 훑어보던 코가네이는 여전히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른 비가 오면 좋을 텐데.
비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왠지 이 시기가 되니 비가 오는 걸 기다리게 되었다. 이유가 뭘까 잠시 생각하던 코가네이는 이제 이쯤하고 교실로 돌아가자는 리코의 말에 허겁지겁 도시락을 챙겨 일어났다.
키요시의 생일은 이틀 뒤였다.
* * *
“생일 축하해, 키요시!”
병원 휴게실에 모여 모두 함께 합창한 생일 축하 소리에 키요시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휴게실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노부인 둘이 활기찬 소리를 듣고 조용히 웃었다.
“다들 고마워. 그냥 축하해 주러 오는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 선물까지….”
키요시는 자기 옆에 소담하게 쌓인 선물을 보고 기쁘게 웃었다. 코가네이가 선물한 도라야키 박스가 제일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맨 아래에서 위풍당당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가네이가 고른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를 쓰고 행복하게 웃는 키요시의 얼굴에 휴가가 케이크 조각을 뭉개 발랐다. 바보같이 웃지 마.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 휴가의 말에 다른 부원들은 모르는 척 웃었다. 키요시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대다가 다시 바보처럼 웃었다. 그 웃음에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는 휴가를 말리는 척하며 코가네이는 낄낄 웃었다.
병원 휴게실이라 다들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다보니 어느새 휴게실에 온 다른 환자들하고도 어울려 케이크를 먹게 됐다. 큰 거 사오길 잘했다, 그치? 코가네이가, 구석으로 빠져 한숨을 쉬고 있는 리코에게 다가가 그렇게 말하자 리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텟페이, 기분 좋아 보이네.”
“그래? 확실히, 다 함께 모여서 놀 수 있으니까 신날 거야.”
“그것도 그렇겠지만….”
리코는 무언가 더 있는 듯 말을 하다가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응? 또 뭔가 있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코가네이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리코는 천천히 난장판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손뼉을 쳤다.
“자, 이제 폐 그만 끼치고 갈 준비 하자. 조금 있으면 비도 올 거 같으니까 얼른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오후 늦게 비소식이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비소식이었다. 코가네이는 창밖으로 보이는, 꾸물거리는 것 같은 구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가 다른 아이들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키요시는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일도 학교에 가야하는 데다 이 이상 휴게실을 점거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별 말 없이 부원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키요시가 모두를 배웅하고 병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를 내며 약하게 창을 두드리던 빗방울은 잠시 뒤 단단한 소리를 낼 정도로 굵어졌다. 작년 이 날과 비슷한 느낌의 비였다.
키요시가 받아온 도라야키를 적절하게 나눠 받은 노인 환자들은 비를 구경하며 간식 타임을 갖자며 로비로 몰려갔다. 어차피 이제 곧 면회시간이 끝날 시간이라 이런 날씨라면 누가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도 깔려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우중충하게 병실에서 복작대고 싶지 않다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할아버지들이었다.
덕분에 병실에 홀로 남게 된 키요시는 다른 친구들이 선물해준 선물들을 다시금 확인해보았다. 코가네이의 도라야키도 그랬지만 다들 자신을 생각해서 준비해주었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키요시는 시큰해지는 코를 한번 훑고는 창밖을 보았다. 제일 받고 싶었던 선물은 아쉽게 받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의 퇴원 날짜를 듣고 나서 가장 먼저 포기했던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하지만―.
키요시가 그렇게 상념에 젖어 있을 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 키요시의 시선이 문으로 향하기 전에 문을 연 당사자의 목소리가 먼저 키요시의 정신을 일깨웠다.
“우와, 아무도 안 계시네? 키요시밖에 없잖아?”
“코가?”
“응! 코가네이님입니다~!”
비에 약간 젖은 모습으로 뒷짐을 지고 있던 코가네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키요시를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키요시는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이야? 뭔가 두고 간 거라도 있어?”
“두고 간 거라기보다는 이제 두고 가야할 게 있어서?”
“응?”
“키요시한테 생일 선물 주러 왔어.”
“그럼 이건?”
키요시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몫으로 남겨놓은 도라야키 중 하나를 들어보였다. 코가네이는 그 모습을 보고 키득대며 웃다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뻗었다.
코가네이의 손에 있던 것은 촉촉하게 젖은 푸른 수국이었다.
키요시는 말을 잃은 채 코가네이 손에 들린 수국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코가네이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자신이 올려다보던 키요시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흔치 않은 상황에 코가네이는 쓰게 웃었다.
“비도 내려서, 작년 생각나고 좋다.”
“…그러게.”
키요시가 희미하게 웃었다. 코가네이는 활짝 웃으며 수국 꽃다발을 키요시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키요시랑 보던 수국이야. 그 공원에 다시 잔뜩 피었더라. 관리인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받아왔어.”
원래는 꽃집에서 살까 하기도 했는데 역시 그 공원의 수국이 좋을까 싶어서 말이야. 아 맞다, 우리가 비 피하던 정자 있잖아. 색 새로 칠했는지 페인트 냄새 나더라? 색이 예뻐진 건 좋은데 지금 가기엔 조금 별로인 거 같아. 코가네이는 키요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둘만 자리한 병실엔 빗소리와 코가네이의 말소리만 조용히 쌓여갔다.
키요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국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코가네이도 잠시 말을 멈추고 수국을 바라보았다. 코가네이와 함께 비를 맞은 수국은 청초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코가, 정말 고마워.”
“뭘. 내가 주고 싶었는걸.”
놀랐지? 장난이 성공한 아이처럼 배시시 웃는 코가네이를 보고 키요시는 빙그레 웃었다. 코가네이는 순간 키요시가 우는 건 아닌가 싶어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맞다, 맞다! 키요시 올해 키 재봤어?”
“어? 어어, 얼마 전 검진 받으면서….”
“그래서, 그래서? 몇 cm였어? 190 돌파했지?”
코가네이가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눈빛에 잠시 몸을 움츠린 키요시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분명, 193cm….”
“으아, 차이 안 줄어들었어! 자랐어도 190 초반일 거라 생각했는데!”
“193은 초반이 아니야?!”
자신의 상식이 부정당한 것 같은 반응을 내비치는 키요시를 보고도 애써 그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지 않은 코가네이는 김이 빠진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키요시는 기운을 잃은 코가네이의 뒤통수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다가 천천히 쓰다듬었다. 여전히 코가네이의 머리를 다 감쌀 정도로, 커다란 손이었다.
키요시는 잠시 코가네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코가는 몇 cm?”
“말 안 할래.”
“엑, 왜? 설마, 코가…키 안 자랐어?!”
“자, 자랐어! 자랐는데! 키요시랑 차이가 하나도 안 좁혀졌단 말이야!”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키요시의 얼굴을 보고 와악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코가네이는 팔을 버둥대며 자신의 울분을 토해냈다. 중학생 때까지는 키에 대해서 정말 콤플렉스 가진 적 없었는데. 코가네이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다음 불만스럽게 다리를 까딱댔다.
키요시의 말에 조금이라도 키가 자랐다면 말해주겠다고 한 작년의 발언이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진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네. 그래서 성적이 그렇게 좋은 걸까? 코가네이는 잠시 키요시를 흘겨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170….”
“그럼 작년엔….”
“계산해서 말하면 나 진짜 화낸다?”
“미, 미안.”
쩔쩔매는 키요시의 표정에 금세 기분이 풀린 코가네이는 부루퉁한 표정을 풀고 기지개를 폈다. 단숨에 우울함을 털어낸 표정이었다.
“그래도, 부에서 내가 제일 작은 건 아니라서 아직 안심이야. 이번에 들어온 1학년들 중에 나보다 작은 후배가 있거든.”
쿠로코라고 감독한테 들었지? 새로 들어온 1학년들에 대해 얘기할 기회를 잡아서인지 코가네이가 다시 활발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리코에게서 전해들은 것도 있었지만 코가네이가 바라보고 있는 면모는 리코와는 조금 달라서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후배들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느낌이었다. 키요시는 해맑게 웃으며 끊임없이 농구부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야기 하는 코가네이를 바라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빗소리만 남은 정적의 순간이 찾아왔다. 코가네이가 목이 말라 주스를 마시면서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코가네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키요시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며 입을 열었다.
“사실, 같이 수국 보자고 했던 거, 잊었을 거라 생각했어.”
“내가 생일날 뭐 갖고 싶냐고 물어봐서?”
“그것도 있고…. 그냥, 1년이나 지났으니까….”
무언가 많은 것을 체념한 것만 같은 말에 코가네이는 잠시 말을 잃었다. 코가네이는 순식간에 비어버린 주스 병을 만지작거리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그렇게 기억력 나쁘지 않아.”
“하하, 알고 있어.”
“일부러 좀 떠본 건데 그때처럼 솔직하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 ‘같이 수국 보기로 했잖아’ 라고 말하면 좋잖아.”
“그러게…. 그치만 아무래도 좀 힘들 거 같다고 생각 돼서….”
“보면 키요시는 농구할 때랑 평상시랑 좀 많이 다른 거 같아.”
“어, 내가 그래?”
“음, 조금 전까지는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지금은 조금 다른 거 같아. 시합할 때처럼 더 끈질기게 달라붙으면 안 돼?”
코가네이의 말에 키요시가 눈을 크게 떴다. 코가네이는 놀란 것 같은 키요시의 표정을 보고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후배들도 들어왔잖아. 세이린의 중심이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아, 얼른 키요시가 돌아와서 같이 시합 나가고 싶다. 나도 내 나름 연습하긴 했는데…역시 중학교에서 날리다 온 애들한테는 어쩔 수 없더라고. 그래도 다들 귀엽고 좋아. 다른 애들도 선배가 됐다고 으스대면 어쩌나 미토베랑 걱정 많이 했는데, 응응, 특히 휴가가 긴장해서 삐끗하면 어쩌나 싶었거든. 뭐 이즈키랑 감독이 있으니까 크게 걱정은 안 했지만―.
그렇게 다시금 세이린 농구부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코가네이는 키요시가 아까부터 계속 별다른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으아아, 시간도 별로 없는데 너무 나만 떠들었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애들도, 이번에 새로 들어온 후배들도 다 좋다는 얘길 하고 싶었어. 역시 그때 농구부 그만두지 않길 잘한 거 같달까! 그리고! 키요시도 좀 더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농구에서만 그러지 말고 이것저것 다.”
코가네이는 웃으며 그렇게 고하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키요시가 자연스럽게 코가네이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비가 내려 약간 습한 탓인지 피부가 맞닿은 부분이 조금 축축하게 느껴졌다.
“키요시?”
코가네이는 가려고 몸을 튼 상태 그대로 고개만 돌려 키요시를 바라보았다. 키요시는 그 특유의,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코가네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코가를 좋아해. 아주 많이.”
속삭이듯 전하는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무척이나 간지럽게 느껴졌다. 코가네이는 배시시 웃으며 키요시의 손을 다른 쪽 손으로 도닥였다.
“나도! 키요시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얼른 퇴원하고 코트에서 만나자!”
해맑은 코가네이의 대답에 키요시는 난처한 듯 웃었다.
“아니, 코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응?”
“나는…….”
키요시가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을 이으려 한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코가네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키요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코가네이의 손목을 놓고는 손을 흔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면회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 있으면 곤란하다고 간호사에게 잠시 한 소리를 들은 코가네이는 민망한 듯 웃으며 키요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생일 축하해, 키요시. 그럼 다음에 보자.”
“응, 조심히 가, 코가. 오늘 고마웠어.”
키요시는 미소 지으며 코가네이가 준 수국 꽃다발을 들어보였다. 코가네이는 그 수국을 보고 뒤늦게 쑥스러운 듯 혀를 낼름 내밀어보이고는 포르르 병실을 빠져나갔다.
병원에 다시 돌아올 무렵만 해도 강하게 내리던 빗줄기는 잠시간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많이 약해져 있었다. 코가네이는 그날 키요시가 씌워주었던 것만큼 커다란 녹색 우산을 펴고는 천천히, 어둑어둑 물든 빗길을 걸어갔다.
마지막에 키요시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좋아한다는 것에 다른 의미가 또 있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렸다.
감독도 있는데 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키요시의 말은 가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기준으로 파악해야하는 때가 있어서 코가네이는 신호를 기다리는 잠시 잠깐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깔끔하게 그만두었다. 괜히 잘못 생각하면 키요시나 감독에게 폐일 것 같기도 했고 이상하게 마음에 두고 있으면 기껏 회복한 키요시와의 관계가 다시 어색해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코가네이는 그런 생각보다, 키요시를 위해 준비했던 저만의 깜짝 선물이 생각보다 잘 먹힌 것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키요시, 진짜 놀랐던 거 같았어.
작년 깜짝 파티 때보다도 놀란 듯 보이던 키요시의 표정을 재차 떠올리며, 코가네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5.
키요시가 곧 돌아올 거란 말을 들었다. 6월 말, 인터하이 예선에서 탈락하고 모두 내심 가라앉아 있을 때였다.
드디어 퇴원하는구나. 코가네이는 티 나지 않게 기뻐하며 로커를 닫았다. 예선탈락은 가슴 쓰렸지만 키요시가 돌아온다고 하니, 새로 들어온 후배들과 과연 어떤 합을 보여줄까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돌아온다는 말은 완전히 퇴원해서 학교에, 농구부에 복귀한다는 거겠지? 혹시나 학교에는 돌아오더라도 농구부에는 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코가네이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봤을 때도 밝아보였으니까. 얼마 전에 봤던 키요시를 떠올리며, 코가네이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 기다린 키요시는 7월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애매한 시기였다.
“오랜만이네, 키요시.”
제일 먼저 반가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조금 얼빠진 소리로 흘러나왔다. 연습복이 아닌 유니폼을 입고 등장한 키요시를 보니 반가움과 동시에 얼이 빠져버려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부원들도 전부 비슷한 상황이었는지 모두 아무 말이 없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키요시의 대답에 차츰 깨어나기 시작했다.
키요시가 얼빠진 소리를 하고 휴가와 이즈키가 태클을 걸고. 작년에 시도 때도 없이 보았던 광경이 그대로 펼쳐져 어떤 의미론 그립기까지 했다. 시합 형식의 연습을 할 때도, 키요시가 있으니 느껴지는 안정감이 남달랐다.
역시 초기 멤버가 다 모여 있으니 좋구나.
카가미에게 1on1을 신청하는 키요시를 보면서도 코가네이는 그런 속편한 생각을 했다. 키요시를 보며 무언가 꾸미고 있다고 투덜대는 휴가의 말에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자신이 보기엔 그냥 말 그대로 카가미의 실력을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자신보다 그와 자주 함께 있던 휴가에겐 키요시의 깊은 속내까지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미토베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과 비슷한 감각일까?
코가네이는 오래간만에 농구하는 키요시를 보면서 키요시의 마음을 아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상상했다. 그건 아마도, 평소 키요시의 말뜻을 파악하는 것처럼 단순하면서도 알기 어려운 감각이지 않을까.
코가네이는 재밌다는 듯 작게 웃었다. 옆에서 츠치다가 의아한 듯 쳐다보았지만 코가네이는 고개를 살짝 젓고 다시 두 사람의 짧은 경기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1on1은 카가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코가네이 군은 어떻게 미토베 군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거야? 우리한테는 하나도 안 들리는데? 정말 모르겠어.
언제였더라, 중학교 시절 반 친구들 중 누군가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미토베의 말을 대신 전해줄 때마다 지나가는 투로 질문을 받았던 적은 많지만 이렇게 대놓고 꼭 답을 들어야겠다고 물어온 적은 처음이라서 코가네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눈만 깜빡였다.
애초에 남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미토베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그대로 옮기는 거였으니까 말을 알아듣는다는 의미와는 조금 방향이 달랐다. 미토베의 시선이나 표정, 몸짓을 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의미의 물결이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감각이랄까, 이렇게 말해도 잘 모르겠지만.
미토베의 여동생인 치구사도 어렵지 않게 제 오빠와 의사소통 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조금만 더 미토베와 친숙하게 지내면 터득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도 키요시와 더 친해지면, 키요시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전에 했던 생각을 다시금 되새기며 코가네이는 재차 웃었다. 옆에 앉아 책을 보던 미토베가 코가네이를 바라보았다. 코가네이는 꼭 장난을 꾸미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 미토베에게 말했다.
“키요시의 숨겨진 생각 파악하기 한번 해보려고. 그렇게 안 봤는데 키요시 은근 속으로 꾸미는 게 많은가봐. 휴가가 그랬어.”
미토베는 일부러 의미심장한 말투를 쓰며 장난스럽게 웃는 코가네이를 보면서 난처한 듯 눈썹을 내렸다. 미토베가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재빠르게 미토베의 생각을 파악했는지 코가네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걱정 마, 걱정 마. 그냥 작은 놀이 같은 느낌으로 할 거니까. 맞추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그나저나 난 키요시, 엉뚱한 방식으로 말하긴 하지만 그렇게 알기 어려운 유형이라곤 생각 안 했거든. 근데 역시 조금 다른 거 같아.
돌아오자마자 엉뚱한 소리를 하고, 화투 이야기를 해서 휴가와 이즈키에게 한 소리를 듣던 키요시를 떠올리며 코가네이는 작게 웃었다. 미토베는 희미하게 웃으며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끼웠다. 이제 슬슬 가자는 신호였다. 코가네이는 앞에 펼쳐져 있던 쓰레기와 빈 콜라 컵들을 정리했다.
오랫동안 앉아 죽치던 마지버거에서 나와, 해가 다 저물어 어두워진 길을 천천히 걷던 코가네이는 길가에 사람이 줄어든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음, 생각할수록 확실히 키요시는 좀 알기 어려운 사람인 거 같아. 나도 그렇고 미토베도 그렇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편이잖아? 그래서 표정만 봐도 알기 쉬운데…뭐랄까, 키요시는 표정을 알기 어렵거든. 그래서 파악하기 어려운 거 아닐까 싶어. 미토베는 어때?”
미토베가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낸다는 말에 반박을 해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미토베 스스로가 반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미토베는 대답하기 어려운 표정만 지을 뿐 코가네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미토베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했지만 아직 불이 켜진 상점들이 많아서 걸어가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 양쪽으로 어우러진 빛을 보며 코가네이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 키요시의 거짓말에 속은 건가봐.”
옆에서 미토베가 허둥대는 기색이 느껴졌다. 코가네이와, 남들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한 미토베는 코가네이의 기분이 가라앉는 기색에 유독 민감했다. 코가네이는 쓰게 웃었다.
“괜찮아. 이 문제는 전에 키요시랑 다 풀었거든. 그때 나한테 했던 말 속에도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구. 그때도……그럴 거야.”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던 키요시의 말을 떠올리던 코가네이는 어째서인지 동시에 생각난, 저를 좋아한다 말하던 키요시의 모습에 얼른 말을 마무리 지었다. 코가네이가 황급히 말을 끝냈다는 사실을 아는 미토베가 무언가 물어보는 것처럼 코가네이를 보았지만 코가네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왠지 지금은 미토베에게 그 일을 상담하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가네이는 다시금 그 일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오늘 오랜만이라고 하던 제게 대답해주던 키요시의 태도는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활동이 끝나고 작별 인사를 했을 때도 그랬다. 역시 자신이 너무 과하게 생각한 거라고 재차 결론 내리며 코가네이는 홀가분하게 기지개를 켰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키요시의 속마음을 조금 더 잘 파악할 수 있을지. 모두가 알기 어려워하는 그의 의중을 누구보다 빨리 캐치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은 플레이어의 마음이 된 코가네이는 작게 기합을 내지르며 각오를 다져넣었다. 옆에서 미토베가 매우 크게 놀랐지만 코가네이는 사과 대신 해맑게 웃으며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키요시의 의중을 알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코가네이는 열심히 연습시합을 하고 있는 1학년들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비죽였다. 키요시가 1학년들만의 시합을 보고 싶어 한 이유를 누구보다 먼저 맞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물론 코가네이를 비롯해 여전히 그 누구도 키요시의 의도를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코가네이는 어쩐지 분했다.
자신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답에,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렇군! 하고 감탄하던 키요시의 모습에 허탈함까지 느꼈다. 그리고 그 후 이어진 키요시의 생각에 역시 키요시는 남들보다 조금 더 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은 아무래도 표면적으로 부진을 보이는 카가미에게 더 집중을 하고 있었는데 키요시는 카가미가 아닌 쿠로코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무언가를 깨달았으면 좋겠다니 그게 과연 무엇일까. 1년 동안 농구를 해왔지만 역시 플레이에 관한 지식으로 깊이 들어가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져서 코가네이는 깔끔하게 그 생각을 포기했다.
1학년들로만 이뤄진 시합은 분명 질 거라는 코가네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세이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코가네이는 시합을 치르느라 고생한 후배들의 등을 마구 두드려주면서 약간 떨어져 리코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키요시를 훔쳐보았다. 시합에 대한 평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시합의 스타팅 멤버가 키요시의 요청에 의해 정해졌으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둘만의 사적인 이야기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던 코가네이는 고개를 저었다. 공과 사가 확실한 리코인 만큼,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코가네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달려갔다. 무슨 이야기 해? 애들이 감독 기다려! 쿠로코처럼 갑자기 나타나 둘을 놀라게 할 생각이었지만 리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코가네이의 말을 받아 1학년들에게로 자리를 옮겼다.
“감독이 시합에 대해서 뭐래?”
당연하게 둘이 시합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거라는 전제 하에 물어오는 코가네이를 난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키요시가 면목 없다는 식으로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시합에 대한 건 전체적으로 이야기 할 거래. 우리 둘이 얘기한 건 이 후에 둘이 저녁 먹자는 거였어.”
“아, 그―래?”
코가네이가 약간 당황한 듯한 반응을 흘렸다. 평범한 남자아이답게 코가네이도 연애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막상 깊은 연애담이나 직접적인 애정관계에 대한 화제에는 매우 취약한지,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에 이렇게 종종 어색하게 반응할 때가 있었다. 자신이 먼저 궁금해 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들었기 때문에 더 그런 모양이었다.
코가네이는 자신의 예상이 또 빗나가버린 바람에 어깨가 축 처졌다. 키요시의 생각도 시합의 결과도 리코와 키요시의 대화도 모조리 꽝이었다. 시합의 결과야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나머지 둘은 은근 코가네이의 마음에 작은 데미지를 주었다.
그런 코가네이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던 키요시가 한 걸음에 코가네이의 옆에 와 섰다. 코가네이가 무슨 일이냐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있지, 코가. 내가 뭔가 꾸미는 거 같아?”
“응?”
“휴가도 그렇고 자꾸 나한테 뭘 꾸미는 거냐고 물어서….”
“아, 그러긴 했지.”
코가네이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요시는 반쯤 울상을 지은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그렇게 구겨져 있으니 불쌍하면서도 웃겨서 코가네이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키요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다들 심통 부리는 거 같은데.”
나도 오늘 넘겨짚은 거 다 틀렸고! 코가네이는 조금 전,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패배의 전당에 올라갔던 대화를 털어내려는 듯 팔과 다리를 크게 뻗었다. 키요시는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코가네이 옆을 따랐다.
“코가도 그렇게 생각해?”
“음, 그렇긴 한데…그렇게 치면 나한테는 감독도 뭔가 꾸미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뭐.”
“그런 거야?”
“그렇잖아. 이유는 설명 안 해주고 일단 시키고 보는 게 많으니까. 지금도 저렇게 무섭게 웃으면서……헉, 큰일 났다.”
코가네이는 리코의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가 눈 속에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키요시의 뒤로 숨었다. 키요시도 리코의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조금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리코는 언제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쥘부채를 휘두르며 사자후를 내질렀다.
“언제까지 노닥거릴 거야! 빨리 집합 안 할래?!”
키요시와 코가네이는 입도 벙긋 못하고 쪼르르 후배들 뒤로 가 섰다. 후리하타와 후쿠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둘을 돌아봐 코가네이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키요시는 그런 둘과 코가네이를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다며 후리하타와 후쿠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키요시의 뒷모습을 보며 후배 둘이 조심스럽게 코가네이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키요시 선배, 약간 특이한 거 같아요.”
“괴짜라고 하던 캡틴의 설명도 알 거 같고….”
아무래도 본 지 얼마 안 되는 선배를 파악하기 어려운지 두 사람의 표정은 난이도 높은 훈련을 선고 받았을 때와 비슷해져 있었다. 코가네이는 해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긴 하지만 그게 키요시다운 거니까. 너희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속편하게 대답하는 코가네이를 보고 후리하타와 후쿠다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매우 알기 어려운 키요시와 다르게 코가네이는 표정과 말투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키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두 선배들, 정 반대이지 않아? 둘은 코가네이에게 들리지 않게 저들끼리 속삭이고는 작게 웃었다.
* * *
지옥과 같던 합숙이 다 끝나고, 연습으로 충실하게 불태웠던 여름 방학도 앗 하는 사이에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타는 듯한 햇볕의 기운은 달이 바뀌면서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 피부에 달라붙는 더위의 감촉은 생각만큼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 더위 사이로 코가네이의 생일이 돌아왔다. 올해는 잊지 않고 미리 자신의 생일임을 동네방네 떠들어댔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축하를 받았다. 서프라이즈를 할 필요도 없어서 농구부에서 챙겨주는 생일 파티도 느긋하게 부활동을 다 끝내고 난 다음이 되었다.
코가네이는 키요시가 준비한 엄청 큰 바움쿠헨을 보고 행복하게 웃었다. 코가네이의 취향은 미토베를 통해 이미 부원들 전체에게 전해진 모양인지 받은 선물과 준비된 음식들 모두 코가네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선물 고마워, 키요시.”
코가네이는 축하를 끝내고 저들끼리 케이크를 나눠먹는 시간이 되자 미토베의 옆이 아니라 키요시 옆으로 와 저런 말을 했다. 키요시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 마음 같아선 더 큰 걸로 사오고 싶었는데….”
“여기서 더 크면 타이어만큼 커지잖아.”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말하곤 큭큭 웃어댄 코가네이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키요시를 마주하고는 싱긋 웃었다.
“근데 그거 말고.”
“응?”
“작년에 내가 말한 선물, 제대로 줬잖아.”
코가네이는 일부러 제가 말했던 구체적인 내용을 입에 담지 않았다. 키요시가 그 말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 바람대로, 키요시는 코가네이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캐치했는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미안함이 담긴 키요시의 표정을 못 본 척 하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코가네이는 기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키요시밖에 줄 수 없는 선물이잖아. 완전 멋진 선물이야~”
행복하게 웃는 코가네이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키요시는 이미 비어버린 코가네이의 접시에 제 몫으로 받은 바움쿠헨을 반 잘라 넘겨주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같이 갈래?”
“응? 아…그, 같이 수국 본 날처럼?”
코가네이는 둘만의 비밀얘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죽인 채 말하곤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만 같이 하교한 건 아니지만 키요시와 단둘이 하교를 한다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날이었다. 작년 키요시의 생일이라고 칭해도 되겠지만 어쩐지 추억 속에 잠긴 그 여름날은, 키요시와 함께 수국을 본 날로 코가네이에게 각인되었다.
키요시는 어려운 부탁을 한 것처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코가네이를 보다가 안도한 것처럼 웃었다. 같이 하교 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코가네이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제 슬슬 갈 준비를 하는 부원들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거의 언제나 같이 집으로 향하는 미토베에게 오늘은 키요시와 같이 가기로 했다고 전하자 미토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엄마한테 친구와 놀고 오겠다고 허락 맡는 아이가 된 기분을 느낀 코가네이는 혼자 웃으며 미토베의 등을 쳤다. 미토베는 당황한 표정으로 코가네이를 보다가 조용히 손을 흔들고 츠치다와 함께 부실을 나섰다. 많은 것을 얘기하지 않아도 저를 이해해주는 친구를 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덕분에 코가네이는 그날처럼, 키요시와 단둘이 하굣길에 올랐다. 해가 점차 짧아지는지 전이라면 아직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을 거리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신비로운 색과 부드럽게 어우러져 있는, 아직 가시지 않은 태양의 붉은 빛을 찾아 눈동자를 굴리던 코가네이는 문득 멈춰선 키요시를 보고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키요시는 웃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저녁과 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빛처럼 오묘한 미소였다.
“우리, 조금 돌아서 갈까?”
“응? 그래!”
코가네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저도 어쩐지 느긋하게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키요시와 함께 있을 때면 유독 그런 느낌이 자주 들었다. 키요시가 미토베와는 다른 느낌으로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건지도 몰랐다.
아직 밤이라기엔 조금 밝은 편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라 모두 가족과 단란하게 저녁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코가네이는 길을 가다 보인 작은 놀이터로 뛰어 들어갔다. 놀고 있던 아이들은 모두 부모님께 불려갔는지 만들다 만 모래성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 놀이터엔 아무도 없었다.
코가네이는 아직 성의 형태를 지니지 못한 모래 언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네에 털썩 걸터앉았다. 갑작스럽게 고등학생 남자애의 무게를 견뎌야 했던 그네가 삐걱,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코가네이는 큭큭 웃으면서 다리로 땅을 박찼다. 그네가 천천히 진자운동을 시작했다. 코가네이는 신경 거슬리게 울리는 그네의 비명소리를 덮으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있지, 그네 실컷 타고 싶어서 저녁 늦게 나왔던 적이 있었어.”
“그래?”
그네를 타는 곳과 아닌 곳의 경계를 나타내는 파이프 위에 기대듯 앉아 있던 키요시가 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코가네이는 바닥에 끌리던 다리를 앞으로 쭉 펴고 천천히 흔들리는 그네에 몸을 맡겼다. 키요시는 흔들리는 코가네이의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응응, 그래서 실컷 타다보니까 중학생 형들처럼 서서 타다가 저 멀리 뛰는 게 해보고 싶어진 거야.”
“그래서 뛰었어?”
“응, 지금 키요시가 서 있는 위치까지?”
“우와…! 어, 근데 여긴….”
순수하게 감탄하던 키요시는 자신이 있는 곳이 착지하기에 알맞지 않은 곳인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마치 지금 코가네이가 그곳까지 뛴 것처럼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키요시의 모습에 깔깔 웃던 코가네이는 홀가분한 몸놀림으로 그네에서 일어나 키요시에게 다가갔다.
“상상한 것처럼 여기에 걸려서 대차게 굴렀어, 어디가 부러진 건 아닌데 잘못 구르면서 머리를 부딪쳐서 조금 찢어졌었나봐. 아직도 흉터 조금 남아있어. 이 부근에.”
코가네이는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이어지는 둥근 부분을 손으로 두드리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도리어 키요시가 더 아픈 표정을 지으며, 코가네이의 머리를 매만졌다. 코가네이는 간지러운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남아있다고 해도 지금 이 상태론 안 보이겠네…순식간에 어두워졌잖아. 우리 더 늦기 전에 갈까? 아, 그래도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우니까 처언처언히…걸어서……키요시?”
장난스럽게 웃으며 천천히라는 단어를 강조하던 코가네이는 말없이 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키요시를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키요시는 코가네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자세 그대로 코가네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키요시는 고개를 갸웃하는 코가네이를 보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코가가 좋아.”
“나도 키요시 좋아해!”
저번과 다름없이 가볍게 웃으며 대꾸하는 코가네이의 모습에 키요시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슬며시 가로 저었다. 코가네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요시는 코가네이의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내려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정면으로 키요시를 마주하게 된 코가네이의 시선이 키요시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슴푸레 밝은 가로등 불빛과 제 안의 강한 감정을 동시에 품고 있는 그런 눈동자였다.
“그거랑은 다른 의미로, 코가를 좋아해.”
코가네이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제 어깨를 잡고 있는 키요시의 커다란 손이 너무 뜨거웠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으로도 매우 잘 보이는, 붉게 물든 키요시의 얼굴이 무척이나 생소했다. 항상 어른스럽다고 여기던 키요시의 필사적인 모습이 은근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멍하니 그런 현실 도피적 생각을 하고 있던 코가네이는 제 어깨를 조금 더 강하게 잡는 힘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런 상황과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금 키요시가 전하고 있는 ‘좋아’의 무게가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무게를 실감하자마자 저 깊숙이 모르는 척 밀어 놓았던 온갖 생각들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코가네이는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입만 벙긋대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가, 감독은?”
“리코는 왜?”
“아니아니,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니었어?”
코가네이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키요시의 행동에 다시 정신을 차린 코가네이가 치고 나오는 것처럼 바로 말을 이었다. 그제야 코가네이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잠시 아, 하고 어색한 감탄사를 내뱉은 키요시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리코랑은 작년에 이미 정리했어.”
“……뭐, 작년?”
“응, 가을이 되기 전에.”
생각보다 무척 일찍 정리된 관계에 코가네이는 입을 쩍 벌렸다. 연애에 관해서는 제 구실을 못하는 머리가 한꺼번에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서인지 순식간에 멍해졌다. 키요시는 그런 코가네이의 표정을 어떻게 여긴 건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서로, 첫 번째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그렇게 정리하기로 했어.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하는 키요시를 보고 코가네이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키요시한테는, 내가 첫 번째라는 말이야?”
코가네이의 말을 들은 키요시는 바로 대답 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시선으로 코가네이를 응시하며 그 커다란 손으로 그의 볼을 조심스럽게 터치했을 뿐이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눈빛과 손길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평소에도 부드럽고 따스하다고 느꼈던 키요시의 시선이 이렇게 뜨거울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전신에 열이 깃드는 느낌이었다. 저녁공기가 안고 있던 늦더위의 열기 때문이 아니었다. 코가네이의 내면에서 생겨난 순수한 열이었다.
코가네이는 제 얼굴이 지금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빨갈 것이란 자각을 함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유리 인형을 매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던 키요시의 손이 아쉬운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이거. 순정만화 전개? 청춘 영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황이 코가네이의 시야를 어지럽게 휘둘렀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제게 주어진 키요시의 감정을 수용하는 것에 급급했다.
“키, 키요시…. 나, 난……그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감정을 받아들이기 바쁘니 스스로의 마음이 어떤지는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코가네이는 반쯤 울먹이는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키요시는 여전히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코가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끈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던 키요시의 입술이 달싹였다. 작은 한숨과 함께 부드러운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코가네이는 그 표정을 보고 제 심장까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키요시는 씁쓸한 표정을 어떻게든 미소로 보이게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경멸스러워?”
“…어, 어?”
“내가 무섭진 않아?”
“아니! 그건 절대…아닌데…! 응! 경멸스러운 것도 아니고 무서운 것도 아니야. 그냥, 지금 조금 당황…그래! 놀라서 그래!”
“어, 내가 놀라게 한 거야?”
키요시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코가네이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키요시는 잘못이 없었다. 이미 이 전에도 같은 감정을 그대로 전했던 그였다. 그 감정을 캐치하지 못한 자신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지금의 코가네이에겐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코가네이는 답을 찾을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억겁으로 느껴질 만한 찰나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순간을 조용히 마무리 지은 것은 안도의 기색이 느껴지는 키요시의 웃음소리였다. 코가네이는 나직하게 깔리는 키요시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키요시가 있었다. 키요시는 매우 홀가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무서워진 게 아니라면 괜찮아.”
코가네이는 차마 뭐가 괜찮은 것이냐고 묻지 못했다. 아까부터 제대로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평소에는 조잘조잘 잘만 움직이던 입이 어째서인지 지금은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코가네이는 이제 가자는 것처럼, 먼저 코가네이의 생일 선물이 든 봉투를 들고 걸음을 옮기는 키요시의 뒤를 힘없이 따라갔다. 그 봉투를 건네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키요시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역까지만. 이라고 말해서 그대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감정을 알게 되니 새삼 이런 작은 배려에도 안절부절못하게 되고 말았다.
정작 코가네이의 머릿속에 고백이라는 거대한 폭탄을 던져 넣은 키요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코가네이는 그 표정에 더 혼란스러웠다.
대화하며 천천히 걸은 것이 아니어서인지 역까지는 매우 금방이었다. 늦은 퇴근과 회식을 하러 가는 사람들도 북적이는 역 광장은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그 한 구석, 코가네이와 키요시가 있는 공간만 무척 조용했다.
코가네이는 키요시가 말없이 내민 선물 봉투를 받아들고 다시금 뜸을 들였다. 코가네이는 이 자리에서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번뇌가 그대로 드러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키요시는 그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그저 웃으면서 코가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일 축하해, 코가. 조심히 들어가고.”
“으, 으응.”
코가네이는 얼빠진 투로 그렇게 대답하고 키요시의 시선에 떠밀리듯 그렇게 전철을 탔다. 그 후엔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정신이 드니 침대에 몸을 던진 채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뒤늦게 키요시와 리코와 자신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키요시가 퇴원을 하고 나서도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깊은 관계는 이미 1년 전에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대체 뭐냐고. 코가네이는 머리를 싸쥐었다. 처음 키요시의 고백을 들었을 때, 그때 그 진실한 무게를 알았더라면 조금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그때 알아차렸더라도 아마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나은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코가네이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자려고 누워도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잠이 오질 않았다. 밤이 되어 차분해지고 나서야 키요시와 자신이 둘 다 남자라는, 매우 단순하고 1차원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그래서 더 잠들지 못했다. 자신이 경멸스럽지 않냐는 키요시의 질문이 이런 이유에서라는 것을 알았다. 코가네이는 양팔로 두 눈을 가렸다.
검은 망막에 수국과 키요시의 고백이 작게 싹을 틔워 순식간에 자랐다. 서로가 남자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경멸이라는 감정은 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잠을 설쳐서인지 코가네이의 모습은 어느 누가 봐도 좋아 보이지 않을 상태였다. 다른 부원들과 만나기 전, 제일 먼저 만난 미토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코가네이에게 단걸음에 다가왔다. 코가네이는 걱정으로 점철된 미토베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어제, 생일이라고 게임 잔뜩 하고 만화 엄청 보다가, 밤 꼴딱 새웠어.”
미토베는 어쩐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코가네이를 응시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코가네이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코가네이는 졸음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저 웃었다. 억지로라도 웃지 않으면 괜히 울어버릴 것 같았다.
매우 티 나지 않게 긴장을 하고 간 아침 연습이었지만 정말, 우스울 정도로 아무 일이 없었다. 키요시는 평소처럼 웃었고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코가네이를 대했다. 아주 조금, 평상시보다 거리를 조금 둔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의 태도가 매우 자연스러웠고 적절하게 다른 부원들이 다가와서 그 느낌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제 밤새도록 키요시와의 관계를 고민하던 코가네이는 조금 허탈해진 심정으로, 카가미와 대화하는 키요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코가네이의 뒤통수에 리코의 응징이 내려앉았다.
“이제 바짝 기합 넣고 윈터컵 준비해야 한다고 한 지가 바로 얼마 전인데 지금 뭐하는 거야!”
“아파! 방금 거 진짜 아팠어!”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당연하지!”
서슬 퍼런 리코의 박력에 흠칫 몸을 사린 코가네이는 얼른 공을 들고 코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리코와도 어색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었던 모양이다. 코가네이는 다시 한 번 힐끔 키요시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런 감정적인 문제보다 앞으로 있을 시합에 더 집중하기로 다짐하면서.
6.
폭풍 같던 윈터컵 예선과 리그전이 끝났다.
라이벌인 슈토쿠와의 시합도 물론 버거웠지만 2학년 전부가 투지를 불태우고 있던 키리사키와의 경기만큼은 아니었다. 매우 짧은 시간만 쿠로코와 교대해 경기를 뛰었던 코가네이는 벤치에서 응원을 하는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키요시의 몸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그의 팔다리에 시퍼런 멍이 늘어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코가네이는 제 옆에 앉은 리코의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평소보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휴가도 그렇고 그 어느 때보다 굳은 얼굴로 시합을 바라보는 리코도 그렇고 그 누구보다 부상을 입은 키요시와 가까이 있었던 만큼 이 시합에 품고 있는 감정은 무척이나 뜨겁고 강할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 시기의 키요시의 마음을 제일 모르는 건 자신뿐일 것이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고 코가네이 스스로도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자책감을 가지고 키요시와 마주했던 그날 이후로 그 화제와 관련된 사항은 의식적으로 밀어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기적인 마음일 수도 있었지만 코가네이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키요시가 스스로 말해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도 있었다.
후반부에 미토베와 교대하고 벤치에 앉은 키요시를 옆에서 올려다보며 코가네이는 조용히 얼음찜질을 해주었다. 차갑고 시린 기운에 한번쯤은 코가네이에게 시선을 돌릴 법도 했지만 키요시의 시선은 끝까지 코트에서 떠나지 않았다. 찜질을 마치고 마찬가지로 코트를 바라본 코가네이는 벤치까지 들렸던 키요시의 말을 되새김질 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떤 순간에도 몸을 던져 세이린 모두를 지킨다. 그걸 위해 난…돌아온 거야!〕
키요시는 여전히 크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시합을 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든든함과 부상에 대한 걱정으로 코가네이의 마음은 마치 시합을 뛰고 있는 것처럼 거세게 뛰었었다.
키리사키에게 승리하고 윈터컵 출전이 결정된 이후, 처음으로 하이파이브를 한 휴가와 키요시, 그리고 그런 둘을 보며 눈물짓는 리코를 보며 코가네이는 제 가슴을 억눌렀다. 시끄럽게 두근거리는 이 심장 소리는 멋지게 시합을 끝낸 모두와 승리 덕분이라 여기며 코가네이는 그렇게 승리를 만끽하는 다른 부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고 그런 회상을 하던 코가네이는 새까만 밤하늘을 보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도 한 차례 들어갔고 그 후 우연히 만난 토오의 팀원들과 사우나 오래 버티기 대결도 했지만 기껏 간만에 온 온천인데 한번만 몸을 담그고 가기엔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뜨거운 물에 부드럽게 몸이 풀려 자연스럽게 꼴사나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코가네이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미토베를 보고 슬쩍 눈을 떴다.
“왜?”
미토베는 차갑게 적신 수건을 땀으로 젖은 코가네이의 얼굴에 얹어주고는 빙긋 웃었다. 코가네이는 당황한 것처럼 수건으로 눈을 가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적 없어.”
남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미토베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코가네이의 옆을 지켰다. 그 말 하려고 일부러 온 거야? 눈을 덮고 있던 수건을 내려 입을 가린 코가네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토베는 대답 없이 그저 웃으며 어깨까지 깊숙이 몸을 담갔다. 코가네이는 그와 반대로 몸을 바로 했다. 따뜻한 온천물이 가슴께에서 찰랑거렸다.
“진짜, 그런 적 없다고.”
코가네이는 토라진 것처럼 말하며 시선을 내렸다. 내가 키요시를 의식하고 있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수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온천 속에 섞여들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미토베가 저런 소리를 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범했는데? 키요시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려고 조금 거리를 둔 게 그렇게 보인 건가?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며 미토베를 보자 미토베는 희미하게 웃으며 지그시 코가네이를 보고 있었다. 코가네이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시선을 피했다. 코가네이는 예전부터 말없이 저를 응시하는 미토베의 시선에 한없이 약했다. 저런 시선으로 바라볼 때면,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던 미토베의 생각을 전혀 알 수가 없어져 저도 모르게 불편해지곤 했다.
“미토베가 왜 그런 말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생각하기 귀찮아진 코가네이는 미지근해진 수건을 미토베에게 던지듯 건네주고는 다시 온천물에 깊이 몸을 담갔다. 코 밑까지 닿는 뜨끈한 기운에 저절로 온몸의 근육이 흐물흐물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미토베는 작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온천을 나서기 전, 머리를 쓰다듬고 가는 손길에서 저를 어린애 취급하는 느낌을 받은 코가네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탕을 나서는 미토베의 뒷모습을 한번 흘겨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토베가 나가는지 드르륵, 문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저에게 가까워지는 발소리도 들렸다. 뭔가 두고 갔나? 머리에 얹고 있던 수건을 다시 바로 잡으며 고개를 돌린 코가네이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키요시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코가?”
“어, 아…키요시도 한 번 더 몸 담그러 온 거야?”
“으응, 다리에 좋을까 싶어서.”
키요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탕에 몸을 담갔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알맞게 떨어진 곳이었다.
잠시 탕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잔잔하게 울렸다. 그 물방울들이 일으키는 파문을 말없이 보던 코가네이는 문득 저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키요시가 미소 지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코가네이는 순간 당황해 눈만 깜빡이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왜,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음, 그건 아닌데 그냥 좋아서.”
“뭐가?”
“몸 따뜻하고, 조용하고…코가도 있고.”
키요시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어깨까지 몸을 담갔다. 코가네이만 괜히 몸을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조용한 공간에 나직하게 울리는 키요시의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 목소리가 지칭하는 대상이 저여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몸에 뜨겁게 열이 오르는 걸 온천의 탓으로 돌리던 코가네이는 일부러 소리 내어 키득키득 웃었다. 웃느라 흔들리는 코가네이 주변에서 시작된 물결이 조용히 키요시에게 닿았다.
“뭐야, 그 말투는. 할아버지 같아.”
언젠가 던졌던 말. 키요시도 그때가 생각난 건지 큭큭 웃었다. 둘에게서 시작된 물결이 소리 없이 만나 하나가 되었다. 조용히 그 동심원을 보고 있던 키요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카만 밤하늘에 노란 달만 휘영청 떠 있었다.
코가네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키요시가 멀게만 느껴졌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코가네이는 몸을 움직여 키요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키요시는 그런 코가네이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전에 코가가 물어본 적이 있었잖아?”
“응? 뭐, 뭘?”
키요시가 자신을 보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그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코가네이가 당황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팔을 멀리 뻗으면 닿을까 말까한 위치에 키요시가 있었다. 키요시는 빙긋 웃으며 코가네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은한 달빛을 품은 시선이 무척이나 부드러워 코가네이는 뜨거운 물속에 있는데도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수국, 좋아하는지.”
“맞아, 그랬지. 그때 키요시, 잘 모르겠다고 했었지 않아?”
“응, 그랬어.”
“지금은?”
“응?”
“그때랑 달라져서 말 꺼낸 거 아냐?”
“역시 코가는 대단하네. 어떻게 알았어?”
별 거 아닌 걸로도 언제나 자신에게 대단하다고 하는 키요시의 말에 코가네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남들이 저렇게 말하면 비꼬는 건가 싶을 텐데 키요시는 언제나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이어서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코가네이는 조용히 키요시의 말을 기다렸다. 키요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코가네이를 응시하다가 다시 수면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수면에 비친 표정에는 작은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전에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조금 싫어했었어, 수국.”
“뭐?”
“지금은 코가 덕분에 좋아졌지만.”
“얘기를 못 따라가겠어, 키요시.”
키요시는 미안한 듯 웃으며 세수를 한 번 했다. 분위기나 표정은 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코가네이는 직감적으로, 키요시가 지금 스스로에게 굉장히 힘겨운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대로 모르는 척 도망갈까 싶었지만 코가네이는 차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코가네이는 그렇게 키요시에게 못 박힌 듯 시선을 두고 앉아있었다. 키요시의 턱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물 위로 떨어져 또 다시 작은 물결이 일어나는 광경이 슬로모션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그날처럼.
“전에 붉은 수국 밑에는 시체가 있다는 이야기 했었잖아? 어렸을 때도 그 얘기 들었었어. 그래서 어렸을 때 한번 수국 밑을 파본 적이 있었어. 돌아가신 아버지가 혹시 거기 계실까 싶었거든. 아버지가 수국을 무척 좋아했으니까, 어머니라면 사랑하는 아버지를 태워버리지 않고 수국 밭에 묻지 않았을까. 그래서 분홍색이거나 보라색인 수국이 보이면 그 아래를 열심히 팠었어. 물론 아무것도 없었지. 그래서 그때는 수국이 무서웠었어. 수국이 아버지를 다 먹어버린 건 아닐까 싶어서.”
생각 이상으로 무거운 얘기에 코가네이는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하던 수국 이야기를 키요시는 어떤 마음으로 듣고 있었을까 생각하니 저야말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키요시는 그런 코가네이의 심정을 알았는지 가볍게 웃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어렸을 때 얘기고 소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그냥 평범하게 수국도 꺾고 놀았는걸.”
“그럼, 왜 싫어진 거야?”
이 이상 파고 들면 안 된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키요시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이야기를 들어주면 키요시가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도 아니면 키요시가 먼저 제 가정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 호기심이 일었는지도 모르고. 과한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외국 속담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던져 버린 질문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코가네이는 몸을 움츠려 따끈한 물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어머니랑 같이 수국을 보러 갔었어.”
소학교 2학년이 된 해의 여름이었을 거야. 나직하게 제 어린 시절을 읊는 키요시의 목소리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코가네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꽃이라고 어머니가 계속 말씀하던 게 기억나.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도 끊임없이 말씀하셨지. 그렇게 꽤 오래 둘이 같이 걸으며 여러 수국을 봤어. 그러다가 내가 힘들어하니까 엄마가 수국 사이에 있는 벤치에 날 앉혔어. 수국에 반쯤 파묻혀 있던 벤치라 거기에 앉으니까 내가 마치 수국 아래에 묻힌 기분이 들었어.”
눈앞이 흐릿해졌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키요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나았지만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는 여전히 나직하고, 고통스럽게 들렸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눈에 고인 물방울만 떨어져 내렸다.
“엄마 혼자 안쪽까지 보고 올 테니까 텟페이는 여기서 조금 쉬고 있으라고 했어. 나도 같이 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너무 아파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렇게 어머니가 두고 간 음료수를 마시며 계속 기다렸어. 수국 향기에 온 정신이 마비될 때까지, 그렇게 계속.”
“그, 그래서, 어머님은…?”
널 데리러 오셨냐고 차마 끝까지 묻지 못했다. 휴가와 감독의 말에서도 느꼈었지만 평소 키요시와의 대화에,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만 있고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어질 이야기는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저런 의문을 뱉고 말았다. 코가네이는 눈가를 뜨겁게 만드는 물기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뿌연 시선을 들어 키요시를 보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이런, 탕에 너무 오래, 있었나.
“코가…?”
키요시가 그제야 코가네이를 바라보고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몸을 움직인 키요시 덕분에 거센 물결이 일었다. 코가네이는 그 물결에 휩쓸린 것처럼 천천히 가라앉았다. 뿌옇게 변했던 시야도, 뜨겁게 녹아내리던 몸도, 제 눈가를 짓누르던 물기도 그렇게 수면 아래로 잠겨들었다.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키요시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듯 먹먹하게 들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코가네이는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어…, 키요……미토베?”
정신이 든 코가네이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제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는 미토베였다. 제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게 마지막까지 같이 있던 키요시일 줄 알았는데. 코가네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코가네이가 일어나면서 건드린 탓에 반쯤 어긋나있던 물수건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코가네이는 아직 어지러운 머리를 한쪽 손으로 짚으며 몸을 돌렸다. 옷을 입히지 못해 맨몸인 코가네이를 덮고 있던 저지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냥 보기에도 무척 커 보이는 걸 보니 키요시의 저지일 것이다.
멍하니 그 저지를 들고 있던 코가네이는 미토베가 건넨 자신의 티셔츠를 느릿느릿 꿰어 입었다. 오랫동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코가네이는 무겁게 느껴지는 머리를 들어 미토베를 보았다. 미토베는 코가네이를 걱정하는 표정을 짓기 보다는 쓰게 웃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될 때까지 탕에 몸을 담그고 있던 코가네이를 약하게 타박하는 느낌이었다. 코가네이는 미안한 듯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키요시는…?”
미토베는 바깥쪽으로 손짓을 했다. 코가네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기가 느껴지는 몸에 키요시의 저지를 걸쳤다. 탈의실에 있는 시계를 확인하니 이미 취침시간은 지난 시각이었다. 감독, 화났어? 조심스럽게 묻자 미토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키요시가 잘 이야기해준 모양이었다. 코가네이가 그렇게 안도의 숨을 내뱉는 사이, 탈의실 문이 열렸다.
“코가, 괜찮아?”
물과 스포츠음료를 품 가득 안고 키요시가 탈의실에 들어섰다. 당황과 걱정으로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보고 쓰게 웃은 코가네이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 때문에 괜히 놀랐겠네, 미안.”
“아냐, 나야말로…갑자기 이상한 얘기해서 미…억!”
코가네이는 발딱 몸을 일으켜 제게 사과하려는 키요시의 양 볼을 양손으로 가볍게 때리듯 눌렀다. 키요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코가네이를 내려다보았다. 코가네이는 어지러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떠 키요시를 노려보았다.
“전―혀 이상한 얘기 아니었으니까. 방금 하려던 말 안 받아줄 거야.”
단호하게 말한 코가네이는 빙긋 웃으며 키요시의 품에 있는 많은 음료수 중 포카리를 골라 단숨에 마셨다. 열이 가득한 몸에 시원한 이온음료가 쏟아지니 온 세포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키요시가 미묘하게 웃었다. 안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키요시의 표정은 여전히 읽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코가네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도리어 옆에서 그런 코가네이를 보는 미토베와 키요시의 표정이 더 큰 걱정과 당혹으로 물들어 코가네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코가네이는 아직 시원한 음료수병을 들어 눈가에 댔다. 몸과는 다른 의미로 뜨거웠던 눈가를 은은한 냉기로 식히며, 코가네이는 듣지 못한 대답에 대한 호기심을 조심스럽게 묻었다.
제 마음속에 키우고 있는 푸른 수국 아래에.
* * *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윈터컵이 막을 내렸다.
코가네이는 세이린에 대한 특집 기사로 가득 차 있는 월간 농구 잡지를 앞으로 조금 밀어놓고 기지개를 폈다. 무척이나 격렬하고 필사적이었던 감각이 꿈결처럼 희미했다. 모두 땀과 눈물로 젖은 얼굴을 하고 찍었던 단체 사진마저 어색하게 느껴졌다.
카가미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부원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던 코가네이는 제 옆에 있던 2호를 보고 피식 웃었다.
“2호도 같이 찍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치?”
코가네이의 손가락이 저를 짚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밥을 다 먹고 코가네이의 발치를 맴돌던 2호가 높게 짖었다. 오늘은 코가네이가 2호의 밥을 챙겨주는 당번이었다. 더불어 2호를 약속장소까지 데려가야 하는 당번이기도 했다. 코가네이는 깔끔하게 16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2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팔을 벌렸다.
“자, 이제 갈까?”
2호는 용케 알아들었는지 얼른 코가네이 품에 뛰어들었다. 가볍게 2호를 안아 올린 코가네이는 천천히 교정을 나섰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감상하며 걷던 코가네이는 저 멀리 보이는 낯익은 인영을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츳치!”
“아, 코가.”
“어라?”
코가네이의 목소리를 들은 츠치다가 몸을 돌리자 그의 몸에 가려져 있던 또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반가움에 뛰어가던 코가네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급하게 멈춰 섰다. 츠치다 앞에 있던 사람이 부드럽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자 색소가 옅은 긴 머리가 차가운 겨울바람에 흩날렸다. 츠치다가 자연스럽게 그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것을 멍하니 보던 코가네이는 저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품에 안겨있던 2호가 깜짝 놀라 낑낑거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츳치…아니, 츠치다 군과 같은 농구부의 코가네이라고 해요!”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코가.”
“그, 그렇지만….”
웃음기가 깔린 츠치다의 목소리에 코가네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하늘을 찔렀다. 소문으로만 접하던 츠치다의 여자 친구를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코가네이는 자신을 보고 미소 짓는 여성에게 민망한 듯 웃어보이고는 얼른 안고 있던 2호를 내밀었다.
“그리고 얘는, 같은 농구부의 테츠야 2호입니다! 편하게 2호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그녀는 귀엽다를 연호하며 조심스럽게 2호를 받아 안았다. 잠시 데리고 놀아도 되냐고 묻는 그녀에게 코가네이 대신 고개를 끄덕인 츠치다는 따뜻한 거라도 사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갑작스럽게 오늘 처음 본 사람과 단둘, 2호가 있으니 단둘이라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 그렇게 츠치다의 여자 친구와 덩그러니 남겨진 코가네이는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전부터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사토시 군이 농구부 처음 들어갔을 때 이것저것 도와준 친구가 있다고….”
“아, 아아! 그건 그냥, 츳치랑 저만 초심자였으니까….”
당연한 일을 특별한 것처럼 말하며 감사를 표하는 그녀에게 황급히 손을 내젓던 코가네이는 앉아서 2호를 쓰다듬고 있는 그녀의 건너편에 천천히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그녀의 손 주위를 맴돌고 있던 2호가 펄쩍펄쩍 뛰며 코가네이에게 다가왔다. 양손으로 2호의 머리와 배를 동시에 쓰다듬던 코가네이는 기회를 보는 것처럼 눈을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뭣 좀 물어봐도 돼요?”
그녀는 긍정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사적인 질문인데 괜찮을까, 싶었지만 코가네이는 길게 망설이지 않았다.
“츳치랑 어떻게 사귀게 된 거예요?”
아아, 뭔가 불만이나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궁금해서요. 황급히 사족을 붙이는 코가네이의 모습을 보고 츠치다의 그녀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쁘네, 코가네이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다시 자신에게 다가온 2호에게 손을 내밀어 턱 밑을 간질여 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냥 사람이 참 좋았어요. 친구로 지내도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자연스럽게 고백을 하더라구요. 처음엔 고백인지도 몰랐는데…아마 제가 불편해 할까봐 일부러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
츠치다다운 이야기였다. 코가네이는 입을 헤, 벌리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만화나 드라마가 아닌 실제로 접하는 연애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만큼의 자극은 없었지만 충분히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야기에 키요시를 겹쳐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코가네이의 시선이 저절로 가라앉았다.
“코가네이 군, 지금 누군가 생각하고 있죠?”
“네? 아…엑, 네?”
갑자기 정곡을 찔린 코가네이가 허둥지둥 몸을 들썩이자 지금까지 작게만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손으로 가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맑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코가네이는 어쩐지 놀림 받은 기분이 들어 부루퉁한 표정으로 2호의 꼬리를 매만졌다.
“신경 쓰이는 사람?”
아, 놀리려고 묻는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자신과 똑같은 말로 질문을 마무리 하는 그녀에게 코가네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에서도 답을 발견했는지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고백을 고민 하는 거예요, 아니면 대답? 코가네이는 두 번째 거라고,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상담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거부감은 적었다. 그녀가 츠치다와 비슷할 정도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답은 아마, 이미 코가네이 군 안에 있을 거예요. 아직 발견을 못해서 그렇지.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찾아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상대도, 정말로 코가네이 군을 좋아한다면 분명 기다려줄 거예요.”
코가네이가 바라던, 명확한 답은 아니었지만 코가네이의 등을 슬며시 밀어주는 대답이었다. 코가네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쪼그리고 앉아있던 다리가 찌르르 저렸다. 그녀도 다리를 통통 치고는 2호를 안아들고 따라 일어섰다.
코가네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 입 앞에 손가락을 교차시켜 엑스 자를 만들었다.
“방금 그 얘기, 츳치한테는….”
“비밀이죠? 알았어요.”
그녀는 작은 비밀작전에 동참하는 어린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런 코가네이의 뒤에서 어이없음을 듬뿍 담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비밀인데?”
“츳치! 왜 이렇게 늦었어?!”
“자판기에 따뜻한 음료가 매진이라 편의점까지 갔다 오느라. 근데 대체 뭐가 비밀이야?”
코가네이는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와 눈을 힐끔 마주치고는 오버스럽게 팔로 엑스 자를 만들었다.
“비밀이니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코가네이의 말을 받는 것처럼 대답하는 제 여자 친구의 모습에 츠치다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코가네이는 그녀에게서 2호를 받아 안고 먼저 손을 흔들었다. 모두와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 자신이 방해해버린 데이트를 조금이라도 더 즐기라는 생각에서였다.
츠치다는 그 이상 묻지 않고 코가네이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건네주었다.
“해결되면, 그때 말해줄게.”
“그래.”
“츳치, 화난 거 아니지?”
“사토시 군, 화난 거 아니지?”
분위기를 가볍게 풀려는 것처럼 일부러 애처롭게 말하는 두 사람을 보고 츠치다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코가네이는 이따 보자고 크게 소리치며 큰 보폭으로 뛰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코가네이 대신 따뜻한 코코아 캔을 껴안고 있던 2호가 바쁘게 뛰어가는 코가네이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짧게 짖었다. 코가네이는 쓰게 웃어 하얀 입김을 뿜어내고는 천천히 멈춰 섰다. 싸늘한 겨울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과연 내 안 어디에 있을까?”
2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코가네이는 그런 2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2호, 좋아한다는 게 뭔지 알아?”
코가네이는 신호를 기다리며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모두와 약속한 장소까지는 앞으로 조금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넉넉하게 남아있으니 서둘러 간다 하더라도 아마 홀로 기다려야 할 터였다. 코가네이는 그렇게 신호 하나를 지나보냈다. 츠치다에게서 받은 코코아는 마시기 알맞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2호가 품에서 내어주지 않아 차마 마실 수가 없었다.
“코코아가 그렇게 좋아? 그래그래, 2호는 코코아가 좋구나.”
나도 좋아해, 코코아. 코가네이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아마 자신이 앞으로 찾아야 하는 감정은 이런 무게가 아닐 것이다. 키요시가 자신에게 전하던 것처럼 묵직하고 안정감 있던, 그런 감정이겠지. 코가네이는 눈이 올 것처럼 회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키요시를 좋아하냐, 싫어하냐 묻는다면 좋아한다고 즉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키요시와 같은 의미로 좋아하는 거냐 물으면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긴 시간이 흘러버렸다.
코가네이의 생일 때 다시 제대로 고백한 이후로, 키요시가 그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코가네이 스스로도 연습과 학업, 시합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미뤄놓았던 문제였다.
이제 확실히 해야겠지.
윈터컵 우승의 여운이 사라지고 바로 든 생각이 이것이었다. 하지만 주구장창 생각을 해봐도 명확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누구에게 허심탄회 털어놓고 상담 받을 수도 없었다. 코가네이는 평소에는 절대로 보지 않는, 짝사랑과 고백에 관련된 순정만화책을 여러 권 뒤적이다가 그만두었다. 고백을 받은 뒤 한참 동안 답을 망설이는 여주인공이 우유부단하다고 다른 캐릭터에게 한 소리 듣는 장면을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말은 쉽지.”
많은 감정이 담긴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다. 코가네이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2호와 눈을 맞추다가 그의 품에 안겨있는 코코아를 쏙 빼들었다. 2호가 불만스러운 듯 목을 낮게 울렸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요령 좋게 한손으로 캔을 따 알맞게 식은 코코아를 단숨에 반 정도 들이켰다.
서늘하게 식은 몸에 따뜻한 음료가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음, 좋아한다는 감정도-이런 느낌이 아닐까.
츠치다 커플의 분위기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게 꼭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저런 종류가 있는 거겠지.
남자가 남자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키요시가 고백했던 순간이 다시 떠오른 코가네이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남은 코코아를 마저 마셨다. 오늘도 역시나 답을 찾기는 틀린 것 같다.
그렇게 빈 캔을 신호 건너편 쓰레기통에 넣은 코가네이는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맑게 웃으며 제게 손을 흔드는 키요시가 있었다.
“키요시!”
“코가, 엄청 일찍 왔네?”
“2호 데리고 오느라 서둘러 나왔는데 시간 계산을 잘못한 모양이야. 그러는 키요시는?”
“음, 난 좀 걷고 싶어서 좀 일찍 나왔어.”
코가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키요시는 기쁜 듯이 웃었다. 코가네이는 머쓱하게 그 웃음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윈터컵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건만 그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자고 다짐한 순간, 키요시의 모든 행동이 눈에 밟혔다. 자의식과잉 아닐까 이거. 코가네이는 저도 모르게 의식해버리는 스스로를 꾸짖고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애들 오려면 조금 남았을 텐데 좀 돌아갈까?”
“코가, 그것보다, 우리끼리 먼저 신사 갈래?”
“어? 그치만 그러면….”
“얼른 소원 빌고 와서 다른 애들하고도 같이 가자.”
“뭐야, 빌고 싶은 소원이 그렇게 많아?”
코가네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신사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약속장소는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 앞이었으니 먼저 신사에 가 있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코가네이는 제 물음에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오는 키요시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의 말과 행동, 시선 전부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불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다행인가, 이거. 코가네이는 제 품안에서 꿈지럭대는 2호를 다시 고쳐 안았다. 2호는 졸린 모양인지 코가네이의 품에 얼굴을 묻고 졸고 있었다. 키요시가 그런 2호를 발견하고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2호 안고 온 거야? 무겁지? 이제 내가 안을게.”
“괜찮아, 2호 기껏 잠들었는데 우리 소원 빌기 전까지 만이라도 좀 자게 두자.”
코가네이는 2호가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웃었다. 키요시의 시선이 코가네이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정면을 향했다. 그래, 그러자. 대답은 그 이후에 나왔다. 이유 모르게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코가네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추워? 키요시는 그런 코가네이의 모습을 보고는 제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코가네이에게 둘러주었다. 졸지에 목도리를 두 개나 하게 된 코가네이가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목도리에 얼굴을 반 이상 묻고 킥킥 웃었다.
“은근 걷기 힘든데!”
입이 가려진 덕분에 목소리가 웅얼웅얼 새어나왔다. 키요시는 하하 웃으며 조금 속도를 늦췄다. 코가네이는 그 속도가 2호를 안고 천천히 걷는 제 속도에 맞춘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목도리에 반쯤 잠긴 얼굴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감각이 일었다.
코가네이는 조금 더 몸을 움츠려 눈만 내놓은 채 걸었다. 목도리에 남아있는 키요시의 체향이 제 뜨거운 입김과 함께 피어났다.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던 감각이었다. 얼굴로 몰려든 열기를 식혀보려 했는데 반대로 더 열이 올라버렸다.
신사 계단을 다 오른 코가네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얼른 2호를 내려놓고 키요시가 둘러준 목도리를 풀었다.
“으아, 이제 더워―목도리 고마워, 키요시.”
그냥 건네주기 뭐해서 설렁설렁 키요시의 목에 감아주었더니 키요시가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다가 뒤늦게 웃었다. 코가네이는 그 웃음을 못 본 척 하고 서둘러 세전함 쪽으로 갔다. 잠에서 다 깼는지 2호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 뒤를 좇았다.
신년이 조금 지난 후에 와서인지 세전함 근처는 새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다. 애초에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이 날짜에 다 같이 오자는 이야기가 된 것이지만, 막상 아무도 없는 세전함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여기서 소원을 빌다가 다른 차원으로 끌려가는 건 아니겠지. 언젠가 본 만화책의 한 장면을 떠올리던 코가네이는 키요시도 제 옆에 다가온 것을 보고 얼른 동전을 찾았다.
방울은 같이 흔들었다. 묵직하게 울리던 쇳소리는 금방 사그라졌다. 코가네이는 손을 모으고 힐끔, 키요시를 훔쳐보았다. 키요시는 눈을 감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소원을 빌고 있었다. 키요시는 무슨 소원을 비는 걸까. 다 같이 오지 않고 따로 와서 빌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소원일까.
코가네이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검은 망막 안에서 푸른 수국이 희게 빛났다. 그 빛이 제 마음 속 어딘가에 있는 답을 찾아내주기를, 지금은 그것만을 소원했다.
꽤 긴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둘의 소원 빌기는 예상보다 일찍 끝이 났다. 집합시간까지 아직 조금 남은 김에 다른 사람들이 적어놓은 에마를 구경하던 코가네이의 뒤로 키요시가 다가왔다.
“코가.”
“응?”
부드럽게 저를 부르는 음색에 코가네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단둘이 있을 때 키요시가 저리 부르면 조금 긴장하게 된다. 저런 음색으로 부른 뒤 이렇게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그시 쳐다볼 때면, 키요시는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중요한 이야기를 던졌었다. 코가네이는 생각보다 뜸을 들이는 키요시를 다시 한 번 불렀다.
“이번엔 코가한테 제일 먼저 말해줄게.”
“뭐를?”
“저번에 퇴원 미뤄진 거 말 못해서…미안하니까.”
“그건 괜찮은데…아, 왜 갑자기 한참 지난 얘기를 꺼내고 그래.”
코가네이는 분위기를 돌리려는 것처럼 낄낄 웃었다. 약간 서글픈 표정으로 그런 코가네이를 내려다보던 키요시가 가볍게 말을 뱉어냈다.
“나 미국 가기로 했어.”
“어? 키요시, 여행 가?”
“아니, 수술하러.”
“우와, 그래! 수술…! 어, 뭐? 수술?!”
코가네이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키요시는 변함없이 웃는 낯으로 코가네이를 보고 있었다. 코가네이는 눈을 부릅뜨고 키요시를 보다가 시선을 내려 그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서 나직하게 긍정하는 키요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미국에서 무릎 수술하고 재활치료 받으면 좋을 거 같다고…알렉스 씨한테 들었거든.”
“어, 얼마나?”
“글쎄, 정확한 기간은 수술하고 정해지지 않을까.”
키요시는 최대한 가벼운 느낌으로 말하면서 웃었다. 그와 상반되게 코가네이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키요시는 쓰게 웃으며 코가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키요시가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말에도 가슴이 쿡쿡 찔렸다. 코가네이는 필사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치만 걱정 되잖아. 키요시 영어 말해야 하는데 괜찮아?”
“아, 맞다. 영어 써야 되지!”
“스케치북에 웬만한 문장은 다 써서 갖고 다닌다거나?!”
“오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아쉽게도 그럴 거면 아예 회화책을 가지고 다니면 된다고 일침을 놔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말려줄 사람이 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 집합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카와하라와 카가미가 먼저 나와 있었다. 소소하게 인사를 나누고 멀뚱히 서서 다른 부원들을 기다리던 코가네이가 2호를 카와하라에게 보내고는 슬그머니 키요시 옆에 섰다.
“다른 애들한테는, 언제 말할 거야? 오늘?”
“아니, 떠나는 날짜랑 일정 잡히면, 그때.”
“아직 아무것도 안 정했던 거야?”
“조금 전에야 가기로 결심했는걸. 오늘 가서 알렉스 씨한테 말해야지.”
코가네이는 말문이 막혔다.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키요시를 봤더니 키요시가 머쓱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코가한테 말한 건, 다짐 같은 거였어. 그런 말이 있잖아, 누군가에게 말하면 실현가능성이 높아진다는…그런 말.”
코가네이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어서 반응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 뜨거운 감정이 키요시를 향한 건지, 자신을 향한 건지부터 불분명했다.
코가네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또 다시 알 수가 없어졌다. 키요시의 속내도, 자신의 마음도.
키요시와 있으면 편안하면서도 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문득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그 서글픔에 잠겨있노라면 정신 가득 비에 젖은 수국향이 차올랐다.
그 계절을 잊은 수국향에 정신이 팔린 코가네이는 두 번째로 마주한 방울 앞에서 아무것도 빌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7.
키요시의 미국행 날짜가 정해졌다.
연습이 끝난 부실에서 키요시가 그 말을 전했을 때, 거북한 정적이 잠시간 그 공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휴가였다. 휴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키요시의 넓은 등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쳤을 뿐이다. 아파! 키요시가 우는 소리를 했지만 휴가는 어떤 리액션도 보여주지 않고 그대로 부실을 나섰다.
하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부원들은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일 테니까. 코가네이는 혼란과 경악으로 물든 다른 부원들의 표정을 보다가 마지막으로 키요시를 보았다. 키요시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어색하게 웃다가 가방을 들었다. 코가네이는 아직 갈 준비를 끝마치지 못한 미토베에게 먼저 가겠다고 눈짓을 하고는 황급히 키요시 뒤로 따라붙었다.
“키요시, 같이 가자!”
“어? 난 상관없지만….”
키요시가 힐끔 미토베를 쳐다보면서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코가네이는 미토베를 신경 쓰는 키요시의 행동을 모르는 척 하고 그의 등을 밀었다.
“키요시한테는 말 안 했지만 키요시가 나한테 햄버거 사줘야 하는 게 있단 말이야. 지금 이자가 붙어서 감자튀김도 사줘야 한다고.”
“뭐?! 그랬어?”
“응응, 그러니까 나랑 같이 마지버거 가자!”
키요시는 당황하면서도 그런 코가네이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코가네이가 그대로 키요시를 밀고 나가버려 조용해진 부실에서 아직 옷을 갈아입고 있던 카가미가 어려운 표정을 지은 채 쿠로코를 돌아보았다.
“쿠로코…그, 저기….”
“네, 오늘은 눈치 없이 마지버거에 가면 안 됩니다, 카가미 군.”
“근데 전에 온천 또 들어가려는 것도 막고…대체 왜 그러는 거야? 키요시 선배랑 코가네이 선배 혹시 싸웠어?”
“헉, 겉보기엔 아무 일도 없어 보였는데?!”
카가미의 추측에 카와하라가 호들갑을 떨었다. 쿠로코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 한 마디로 이 상황을 일축해버린 쿠로코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다른 선배들과 눈을 맞추고 싱긋 웃었다.
추운 겨울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저녁 시간이 제일 붐빌 법한 패스트푸드점 역시 생각만큼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키요시와 코가네이는 일단 말없이 햄버거를 반 정도 먹어치웠다.
“저기, 코가…내가 뭔가 잘못한 거 있어? 햄버거로 괜찮은 거야?”
“어, 그 말은 감독이 안 전했어? 너무 오래 전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일이라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한데. 그리고 봐, 이렇게 감자튀김까지 얻어먹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키요시를 데리고 나오기 위한 방법으로 예전에 가볍게 던진 말을 끄집어냈었던 코가네이는, 키요시가 설마 진지하게 그 내용을 물어볼 줄 몰라서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표현을 어떻게든 했지만 키요시는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이때까지 조용히 있었던 건 이 질문을 하기 위한 타이밍을 잡고 있었던 건가.
멍하니 감자튀김을 보고 있던 코가네이의 귓가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느낌을 담고 있는 키요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뭔데?”
“아니, 진짜 별거 아냐. 전에 키요시랑 다 푼 문제인데 그냥 내가 한번 말해본 거고….”
코가네이는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가다가 키요시의 시선에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키요시는 여전히 강하지만 부드러운 눈빛으로 코가네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괜히 애꿎은 빨대만 이리저리 저어 얼음들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만 내던 코가네이가 결국 작은 한숨을 폭 쉬며 고개를 들었다.
“키요시 퇴원 늦어진 거. 나만 늦게 알았잖아. 그래서 그때 애들이 불편해 하는 거 같길래 나중에 키요시한테 햄버거 얻어먹고 풀겠다고 한 거뿐이라고. 정말 별거 아니지? 이미 다 푼 건데 괜히 또 말하게 돼서 민망하잖아.”
나 늦게 알았다는 얘기 하면서 감독이 얘기했을 줄 알았는데. 코가네이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머쓱했는지 입술을 비죽이며 남은 햄버거를 입에 물었다. 키요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제라도 말해줘서 고마워.”
“저기, 키요시가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내가 더 불편한데….”
“아, 그렇겠구나! 미안해. 햄버거 더 먹을래? 감자튀김도!”
“그러니까! 내가 방금 말했잖아. 뭘 들은 거야.”
코가네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남은 얼음을 입에 넣었다. 가게 안은 무척이나 따스한데 입에서 입김이 나올 것 같았다.
끼니를 때우고 밖으로 나온 둘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늘 밤에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 때문인지 우산을 든 사람이 종종 보였다.
누가 먼저 가자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둘의 발걸음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둘이 함께 수국을 보았던 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코가네이와 키요시는 어둠 속에 자리한 정자 앞에 당도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키요시는 뽀얀 입김을 뿜어내며 말문을 열었다.
“춥지 않겠어?”
“괜찮아, 추위에 대한 준비는 아까 키요시가 인형 탈 쓴 사람 앞에서 만담하고 있을 때 끝마쳤거든!”
“응? 내가 언제 만담 했어?”
“했어. 인형 탈 쓴 사람이 땀 흘리는 게 보일 정도로!”
“우와, 인형이 땀 흘리는 것도 볼 수 있다니, 코가 대단해.”
코가네이는 그저 웃으며 가방에 넣어놓았던 손난로와 따뜻한 캔 음료를 꺼냈다. 키요시가 블랙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는 건 감독과 휴가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맛으로 살까 고민하다가 그냥 코코아로 통일했다. 키요시한테 조금 안 어울리려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반대로 은근 잘 어울리는 것 같고 키요시도 좋아하는 것 같아 코가네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전염된 듯 키요시도 작게 웃었다.
“코가랑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
“음, 그것도 그런가? 하긴 전에는 여기 안 들르고 돌아갔으니까.”
“그것도 있고. 지금은 수국 필 계절이 아니니까….”
지금은 그저 까맣게만 보이는, 수국이 피어 있던 장소를 돌아보며 키요시가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긴 내가 코가를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깨달은 장소거든.”
“어, 뭐?”
코가네이는 예상하지 못한 키요시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키요시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거의 다 식은 캔만 만지작거리던 코가네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키요시가 좋은 사람인 것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알고 있는데도 입은 처음 고백을 인지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을 내뱉어야 하는데 입술 사이로는 소리가 되지 못한 뜨거운 숨결만 하얗게 피어났다.
“좋아해, 코가.”
“…….”
“미안, 계속 들어도 코가만 불편해질 뿐이란 거 아는데….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 이 장소에서 다시.”
코가네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키요시와 눈이 마주쳤다. 그 미소를 보고 차마 제일 처음 생각난 의문을, 리코와의 관계를 깊게 묻기가 겁이 난 코가네이는 마음속에서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1년 만에 말했던 거네, 그러면?”
밑도 끝도 없이 던진 말이지만 키요시는 용케도 그 의도를 파악했는지 반 박자 늦게 아,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때도, 고백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야.”
“근데 왜 갑자기….”
그 당시를 떠올리는 건지 키요시의 시선이 코가네이에게서 잠시 떠나 먼 곳을 향했다. 코가네이는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고 진득하게, 키요시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때―.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며 키요시는 재차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과 다르게, 그 시선은 뜨거운 열을 품고 있었다. 코가네이는 조금 식었던 제 몸이 그 열기를 받고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코가가 평소에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보라고 해서.”
“뭐?”
“시합 때처럼 포기 하지 말라는 것 같아서…. 포기 하지 않기로 했어.”
키요시는 그렇게 말하고 해맑게 웃었다. 무언가 후련해진 표정이었다. 그 말에 입만 벙긋대던 코가네이는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뭐야, 그게. 내가 지금 곤란한 게 결국 내 탓이라는 거네? 아니 어떤 의미론 맞지만.”
그의 고백을 제대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 거절하지도 않고 정리되지 않은 관계를 끌어온 것이 자신이긴 했지만 본질적인 이유, 그 기저에는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이 제멋대로 했던, 둘 다 해보라는 말도 키요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었다.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키요시 텟페이는.
코가네이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키요시를 힐끔 다시 올려다보다가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키요시는 쩔쩔매는 기색으로 몸을 움츠렸다.
“미, 미안. 코가가 그렇게 곤란해 할 줄은 몰랐어. 난 딱히 대답을 바란 게 아니니까 그렇게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진짜야!”
“아니야, 내가 확실하게 해야 하는 문제인데…. 나야말로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는 소리가 무척이나 작게 나왔다. 코가네이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죄책감이 그렇게 만든 걸지도 몰랐다. 그 작은 모습을, 많은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보던 키요시가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올해 생일은 같이 축하 못 해줄지도 모르겠다. 미리 사과할게.”
“그렇게 치면 네 생일 때도, 같이 수국 못 보잖아.”
먼저 올 자신의 생일보다 코가네이의 생일을 먼저 챙기는 키요시의 행동에 코가네이는 속에서 뭔가 울컥 밀려올라오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 기분이 말투에 고스란히 담겨 약간 볼멘소리로 나오고 말았다. 키요시는 그 말에 잠시 눈만 깜빡이다가 기쁜 듯, 서글프게 웃었다.
“그러게, 그렇게 되겠네.”
분명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는데 어쩐지 키요시가 울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괜히 저까지 울 것 같아진 코가네이는 조심스럽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게 젖어 올랐다.
키요시가 미국을 간다는 것을 제일 먼저 들었으면서도, 아쉽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그렇게 실감을 하지 못했었는데. 몇 달 뒤에는 이 장소에 함께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치듯 밀려왔다.
코가네이의 그 감정이 형상화된 것처럼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코가네이가 눈을 보고 먼저 반응하기 전에 키요시가 먼저 손을 뻗으며 일어났다. 장갑을 벗은 커다란 손 위로 작은 눈송이가 내려앉자마자 빠르게 녹아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키요시를 바라보며 코가네이도 천천히 일어나 키요시 옆에 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눈송이가 굵어졌다. 키요시가 코가네이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주며 바보같이 웃었다. 코가네이는 자기도 키요시 머리 위를 털어줄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그래도 키요시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자연스럽게 잦아들 무렵, 둘 사이에는 반걸음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그 거리를 가라앉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키요시가 흰 입김을 뿜으며 입을 열었다.
“코가.”
“응?”
“한번만 안아 봐도 돼?”
코가네이는 어려운 표정으로 키요시를 올려다보았다. 곤란함이 가득 담긴 그 얼굴을 보고 키요시는 쓰게 웃었다. 그냥 한번 말해본 거야. 그 모습을 본 코가네이는 계단을 하나 올라가 키요시 앞에 서서 양 팔을 벌렸다.
“어쩔 수 없지, 키요시 지금 무지 추워 보이니까! 코가네이님이 따뜻한 품으로 안아줄게!”
키요시가 멍한 표정으로 코가네이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고개를 잔뜩 숙이거나 젖혀야 마주볼 수 있던 시선이 지금은 그나마 자연스럽게 맞았다. 자기가 먼저 안아도 되냐고 물어봤으면서 키요시는 낯설어 하는 것처럼 어색하게 팔을 벌렸다.
살짝 감고만 있다는 느낌으로 제 등에 팔을 두르고 있는 키요시를 보던 코가네이가 눈이 소복이 쌓인 키요시의 등을 강하게 감싸 안았다. 귓가에 키요시의 숨결이 뜨겁게 내려앉았다. 조금 놀란 것 같은 음색이 섞여 있던 것도 같다. 코가 품, 진짜 따뜻하다. 키요시의 뜨거운 숨결엔 약간의 울먹임도 깔려 있었다.
그 숨결에 제 몸이, 제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코가네이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키요시, 있잖아.”
“응?”
귓가뿐 아니라 심장도 간질간질해졌다.
“내가, 미국 가지 말라고 하면, 키요시는 어떡할 거야?”
키요시가 숨을 깊게 들이쉬는 기색이 느껴졌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등을 꼭 쥐고 있던 코가네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갑게 내려앉은 심장과 다르게 입에서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코가네이는 그 잠시간 또 다시 하얗게 눈이 쌓인 키요시의 등을 팡팡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에이, 농담이야, 농담. 그냥 만화나 드라마처럼 말해본 거야.”
그러니까 내 말에 너무 휘둘리지 마. 내 말이 뭐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줘. 내가 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지 말아줘.
코가네이는 그 많은 말을 마음속에 묻으며 키요시의 등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키요시는 뒤늦게 코가네이의 작은 몸을 으스러질 것처럼 꼭 껴안았다. 평소라면 숨 막힌다고 투덜댈 코가네이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코가네이는 키요시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라는 이유로 애써 납득하려 했다.
키요시가 천천히 팔을 풀었다. 키요시가 몸을 떼면서 차갑게 언 볼이 스쳤다. 그리고 입술에도,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보드라운 눈송이가 내려앉아 녹는 것처럼 매우 찰나의 감촉만 남았다.
코가네이는 모르는 척 빙긋 웃으며 키요시를 바라보았다. 키요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없이 코가네이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바로 했다. 그의 어깨와 머리에 쌓인 눈이 조금 흩날렸다. 제 발치에 쌓인 눈을 잠시 바라보던 키요시가 후련한 표정으로 다시 코가네이를 응시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응.”
말을 뱉는 목이 무척이나 뜨겁고 따가웠다. 다행스럽게도 그 뜨거움은 코가네이가 건넨 짧은 한 마디에 실려 있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얼른 제 품속에 있어 아직 따뜻한 핫팩 하나를 꺼내 키요시에게 건네고는 그의 몸을 돌려세웠다.
“이제 얼른 가자. 할머니, 할아버지가 걱정하실라.”
“그렇게 치면 집이 먼 코가가 더….”
“난 괜찮아. 부모님도 어차피 늦게 오시고.”
코가네이는 키요시의 등을 밀며 얼른 정자 그늘을 벗어났다. 코가네이는 그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고개를 돌려 앙상한 어둠 속에 있는 수국 자리를 눈에 담았다. 그 자리에도 소복하게 흰 눈이 쌓여 있었다.
둘이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은 매우 금방이었다. 키요시는 어떻게든 코가네이를 역까지 바래다주려 했지만 코가네이가 한사코 거절했다. 계속 자신을 돌아보며 멀어지는 키요시를 가만히 서서 배웅하던 코가네이는 키요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눈길을 박차고 달렸다.
꾹꾹 눌러 참았던 뜨거움이 왈칵 솟아올랐다. 눈발이 날려 아무도 없는 작은 공원에 도착한 코가네이는 꽁꽁 언 손으로 힘겹게 전화를 했다. 전화 상대는 코가네이가 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금세 공원에 나타났다. 코가네이는 훌쩍이면서 웃었다.
“미토베에―”
우산을 쓰고 나타난 미토베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그저 눈인지 눈물인지로 차갑게 젖은 코가네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코가네이는 흐느껴 울며 고개를 숙였다.
“나, 바보야. 다 알고 있었으면서.”
미토베는 쓰게 웃으며 차갑게 언 코가네이의 몸을 다독였다.
뒤늦게, 제 속에 자리하고 있던 답을 마주한 코가네이의 오열은 그 후로도 길게 이어졌다.
수국 아래를 파도 아무것도 없던 것이 당연했다. 코가네이가 가지고 있던 감정은 이미 오래 전에 소리 없이 싹을 틔웠다. 그 감정으로 물든 수국을 어여쁘다 바라보면서도 코가네이는 자꾸 그 아래를 파고 있었다. 그 수국을 어여쁘게 물들인 무언가가, 자신이 찾는 답이 그 아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이미 제 마음이 수국향으로 가득한데도. 그 향을 모르는 척, 그저 그렇게.
그 외면이 지금 흰 눈과 함께 코가네이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코가네이의 안에 피어난 수국이, 그 여름날처럼 푸르게 젖었다.
그렇게 밖에서 한참을 울다 집으로 돌아간 코가네이는 그대로 앓아누웠다. 때늦은 연정의 열병은 코가네이를 하루 꼬박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다음날이 휴일이어 다행이었다. 이 짙은 후회를 안고 키요시를 바로 마주할 자신이 지금의 코가네이에겐 없었기 때문에.
그 흰 눈발이 날리던 날 이후로 코가네이와 키요시의 사이는 평소와 같은 듯 같지 않았다. 하지만 부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소리 내어 짚어내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스스로도, 키요시를 데면데면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태도를 자연스럽게 바꿀 수가 없어서 남몰래 머리를 쥐어뜯었다. 키요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불편했다.
코가네이는 자연스럽게, 이상하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키요시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키요시가 미국에 갈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이었다. 무릎 상태 때문에 당연하게 부활동도 쉬게 된 키요시와 마주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애초에 부활동이 아니면 함께할 시간이 매우 적은 사이이기도 했다.
키요시와 마주치지 않는 동안 키요시와의 관계를 새삼 되짚어 가던 코가네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미토베가 그런 코가네이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에 괜히 기분이 상한 코가네이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흘겼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말도 안 해주고.”
“그건 스스로 알아내는 게 중요한 거라고.”
미토베 옆에 조용히 앉아 햄버거를 먹던 츠치다가 대신 대답을 했다. 코가네이는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이미 비어버린 콜라 컵만 흔들어댔다. 대놓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저를 보는 표정이나 건네는 말의 뉘앙스를 보면, 이 둘은 이미 제가 감정을 깨닫기 전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코가네이는 그 사실에 작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렇게 알기 쉬웠어?”
코가네이가 눈만 살짝 치뜬 채 물었다. 불만이 남아있는 입술은 여전히 조금 내밀어진 상태였다. 츠치다와 미토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코가네이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미토베가 황급히, 감자튀김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쟁반을 옆으로 치웠다.
“둘 다 너무해.”
마지버거에 자리를 잡자마자 츠치다의 여자 친구와 했던 비밀 얘기를 빌미로 이미 츠치다에게 강한 공격을 받았던 코가네이의 정신은 그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키요시를 평소 이상으로 의식해버리니 더더욱 죽을 거 같았다. 츠치다에게 이런 경우를 상담했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더 놀려먹으려고 하는 게 느껴져서 코가네이는 질색을 했다. 어린 동생을 놀리는 짓궂은 형처럼 코가네이를 보며 웃던 츠치다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기울였다.
“그래서, 키요시한테 언제 말할 건데.”
“남의 연애사에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츳치 씨.”
“경험이 없는 코가 씨가 너무 쩔쩔 매는 것 같아서요.”
미토베가 소리 없이 웃었다. 코가네이는 볼을 부풀려 빨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얼음만 남은 콜라 컵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츠치다의 표정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얼른 결정해.”
코가네이는 핸드폰을 들어 달력을 켰다. 키요시의 출국일은 어느새 다음 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코가네이는 홀가분하게 웃으며 달력을 껐다.
“이미 결심했어.”
그 미소를 마주한 츠치다와 미토베가 안도한 듯 웃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코가네이는 침대에 누워 제가 만든 수국 책갈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눈 오는 날, 이미 굳건하게 다져 올린 결심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 * *
키요시를 배웅하는 자리는 생각보다 조촐했다. 키요시가 배웅은 필요 없다 말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와 처음부터 함께 한 농구부 2학년 멤버는 전원 공항에 집합했다. 이렇게 모이자 하고 약속을 따로 잡은 것도 아니지만 모두 당연하다는 듯 키요시 앞에 모였다.
키요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안도한 웃음을 흘렸다. 창밖을 바라보며 오지 않은 1학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키요시에게 와주길 바란 거냐고 가벼운 태클을 건 코가네이는 유독 감상적이 된 휴가를 앞세우고 얼른 뒤로 빠졌다. 방금까지 괜찮았던 기분이 이상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괜히 싱숭생숭해져서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에 넣어온 물건을 만지작대고 있는데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그 기척의 주인을 확인한 코가네이는 힘없이 웃었다.
“키요시.”
“코가.”
서로를 부른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키요시였다. 키요시는 작게 웃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로 커다란 비행기가 여럿 보였다. 저 중 어느 비행기를 타게 되는 걸까.
둘 사이에는 여전히 반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오늘은 코가네이가 그 거리를 안타까운 듯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요시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코가한테 미국 간다고 말했을 때는, 꽤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 엄청 빨리 지나가 버렸네. 코가랑 조금 더 많이 놀고 싶었는데.”
코가네이가 알게 모르게 저와 거리를 두었다는 것을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도 키요시는 저리 말을 했다. 코가네이는 어색하게 수긍했다. 그러게. 시끄러운 공항인데도, 작은 목소리로 뱉은 말인데도 키요시는 용케 그 말을 들은 모양인지 기쁘게 웃었다.
“가서 치료 잘 받고 와. 키요시는 농구할 때가 제일 멋지니까.”
“어, 그럼 평소의 나는 별로야?”
“글쎄에?”
“코가?!”
그 언젠가의 반대가 된 것 같은 대화흐름에 코가네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 웃음을 눈부시다는 듯 보던 키요시는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제대로 치료하고 올게. 코가랑 다시 농구하고 싶으니까.”
“키요시, 이제 슬슬 들어가야 돼.”
둘을 배려해준 건지 알렉스가 저 멀리에서 소리쳤다. 키요시는 서둘러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코가네이를 마주했다. 이제는 알 수 있는, 그 특별한 시선을 본 코가네이가 서글프게 웃었다. 주머니 속에서 꼭 말아 쥔 손에 땀이 찼다. 코가네이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 뒷짐을 졌다. 키요시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코가, 내가 지금 이런 말을 또 하는 게 제멋대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코가가 정말….”
“키요시.”
망설이던 모습과는 다르게 매우 빠르게 이어지던 키요시의 말은 코가네이의 목소리에 막혀 길을 잃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저를 부른 코가네이의 말에 불안한 기색으로 눈동자만 굴리는 키요시를 보며 코가네이는 빙긋 웃었다.
“잠깐, 손 좀 내밀어 봐.”
“응? 어어.”
키요시는 이유를 묻지 않고 제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저만큼이나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그 손을 바라보던 코가네이는 길게, 길게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원체도 작았지만 커다란 키요시 손에 올라가니 더더욱 자그마해보였다. 키요시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코가네이를 쳐다보았다.
“책갈피?”
“응, 내가 만든 거야. 그날 가지고 돌아갔던 수국으로.”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 책갈피에 담긴 마음도, 그것을 이렇게 건네는 자신의 저의도. 코가네이는 그저 둘의 추억을 머금은 채 아름답게 마른 수국 한 송이를 키요시에게 주었다.
키요시는 매우 많은 것을 묻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이제 둘에게는 시간이 그리 남지 않았다. 코가네이는 울상인지 놀라움인지 아쉬움인지 아니면 그 전부인지로 얼룩진 키요시의 표정을 보며 살포시 그의 등을 밀었다.
“다음에 또 같이 수국 보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키요시에게 기다리라고 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말을 끝으로 코가네이는 키요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키요시는 제 손에 들린 책갈피를 한번 보고 울 것처럼 웃었다.
키요시가 그 선물의 의미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모르겠지만 코가네이는 후회하지 않았다. 제 마음을 깨달은 그날, 그 흰 눈보라 속에서부터 이렇게 하리라 마음먹었던 일이다.
어느 누구는 교활하다 비난 할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못됐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코가네이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자신의 아집으로 키요시가 제게 품었던 마음을 접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코가네이로서는 키요시가 자신에게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키요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코가네이는 자신이 미국에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을 거냐 물었던 물음에 딱딱하게 굳었던 그 너른 등의 감촉을 털어내려는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키요시의 모습은 이미 게이트 너머로 사라진 후였지만 코가네이는 쉽사리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코가, 이제 슬슬 돌아갈 거야.”
“잠깐, 나만 두고 가지 마!”
저 멀찍이 떨어져 외치는 휴가의 부름에 코가네이는 허겁지겁 부원들에게로 뛰어갔다. 츠치다나 미토베가 제 행동에 대해 무언가 한 마디 하지 않을까 조금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둘은 아무렇지 않게 코가네이의 어깨만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 옆으로 이즈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걸로 된 거야?”
“응. 이거면 돼.”
코가네이는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휴가가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미국이라고 해도 예전처럼 연락이 힘든 것도 아니니까, 그놈이라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헛소리로 가득한 라인을 보낼지도 몰라. 휴가의 말에 리코를 시작으로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키요시라면 그럴지도 몰라. 너나 할 것 없이 맞장구를 쳤다.
코가네이는 그렇게 왁자지껄한 부원들과 공항을 나서며 크게 기지개를 폈다. 키요시가 탄 비행기는 아니겠지만 이제 막 이륙을 시작한 비행기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코가네이는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눈에 담으며 키요시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소중한 한 마디를 소리 없이 읊조렸다.
키요시가 앞으로 날아갈 하늘은, 그날 둘이 푸르게 젖은 채 감상하던 수국의 색을 띠고 있었다.
그 빛을 바라보는 코가네이의 눈가는 제 안에 흐드러지게 핀 수국처럼 수줍게 붉었다.
fin.
다시 여름, 그리고 수국
미국의 6월은 일본처럼 비의 계절이 아니었다.
이곳은 겨울에 비가 더 많이 오거든. 비를 기다리는 것 같은 키요시에게 알렉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주었다.
그리 길지 않은 미국 생활이었지만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비슷하다고 했던가. 키요시는 대화가 단조로운 것만 빼면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미국행을 제안했던 알렉스도 물론 그랬지만 미국에서 살았던 후배 카가미도 메일이나 라인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해주어 타국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매우 수월했다.
당사자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은 걱정을 했던 수술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생각했던 것만큼 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던 키요시에게 알렉스는 그 후에 있을 재활훈련이 더 고될 것이라며 겁을 주었다. 키요시는 묵묵히 그 재활훈련을 버텨냈다. 알렉스가 미리 엄포를 놓았을 정도로 고되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리코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주어지는, 악마 같은 연습 메뉴에 비한다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키요시는 혼자인 타국 생활에 익숙해졌다. 병원 생활은 일본과 비슷했지만 병문안을 와주는 사람이 알렉스뿐이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키요시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늘었다. 미국에 오기 전 급하게 바꾼 스마트폰은 멀리 떨어진 친구들과도 바로바로 연락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자신이 참가하지 못하는 농구부의 이모저모를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도 있었다. 새로 들어온 후배들에 대한 이야기, 그날 연습 중에 있었던 특이한 사건들, 크고 작은 시합들의 결과들까지.
물론 17시간의 시차까지 채워주는 것은 아니어서 긴 시간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키요시는 만족했다. 물론―약간의 아쉬움이 존재하긴 했지만.
『코가는 요즘 바쁜가? 연락이 잘 안 되는데.』
『네놈이 보내는 실없는 연락에 대답해줄 시간은 나한테도 없어.』
마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가차 없는 휴가의 말에 키요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매우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리코, 휴가와 다르게 코가네이와의 연락은 매우 형식적으로만 이루어지곤 했다. 간단한 안부, 특별했던 일, 그리고 푹 쉬라는 마무리 인사.
실제로 얼굴을 보면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자로 전하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키요시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면 일기장에 꽂아놓은 수국 책갈피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일본의 운치를 머금고 있는 그 수국을 볼 때면 시원한 습기로 가득 찼던 그날의 공원이 아스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국에도 물론 수국은 있었다. 커다란 꽃집에서는 각양각국의 수국을 색색별로 늘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처럼 공원에 수놓아진 수국을 보기는 조금 힘들었다. 물론 지금 키요시의 다리로는 수국이 핀 공원을 찾아가기 조금 버겁다는 이유도 있었다. 덕분에 새벽부터, 알렉스의 차를 얻어 타고 약간 먼 공원에 나와 있는 실정이었다.
『이쪽은 이제 10일 됐으니까 미리 생일 축하하고 난 이만 잔다.』
퉁명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휴가의 라인 메시지와 함께 매우 귀여운 생일 축하 스티커가 키요시의 휴대폰으로 날아들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날짜의 변화보다는 요일의 변화만을 느끼며 지내던 키요시는 벌써 자신의 생일이 되었나 싶어 기분이 묘해졌다.
이곳에는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생일은 일본의 장마철과 겹쳐 있어 언제나 빗소리, 비의 향과 함께였다. 익숙하게 피부에 닿던 습기가 느껴지지 않는 생일이라니 어쩐지 매우 낯설었다.
수국, 보고 싶다.
공원 벤치, 푸른 수국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키요시를 보고 알렉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스는 키요시를 놀리는 것처럼 웃으며 바로 앞을 가리켰다. 그럼 저건 뭔데? 수국이죠. 키요시 군, 눈 나빠진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알렉스는 대충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흔들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론 부족한 거구나. 수국보다 더 중요한 게, 없는 거지?”
키요시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자신보다 조금 더 오래 세상을 겪은 어른은 이 말만으로도 많은 것을 꿰뚫어보는 모양이었다.
“수국 좋아해?”
“네.”
키요시는 어린 아이처럼 웃었다. 그 웃음을 따라 미소 짓던 알렉스가 짧은 텀을 두고 계속 진동을 울려대는 키요시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오늘따라 뭔가 많이 오는데 일본에서? 일본은 지금 밤 아니야?”
“네, 근데 그쪽에서 날짜 바뀌어서 그런지 생일 축하한다고 계속 오네요.”
“생일? 9일? 아, 일본에서 날짜가 바뀌었다면, 10일이겠구나.”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크게 기지개를 폈다. 상쾌한 아침공기가 찌뿌둥하게 가라앉았던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이제 곧 18살인가. 혹시 받고 싶은 선물이라도?”
“괜찮아요. 제일 바라는 선물은 일본에 있거든요.”
“헛, 뭐야. 설마, 혹시! 좋아하는 사람?”
알렉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음흉하게 웃었다. 키요시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키요시 군, 은근 알기 쉬우니까.”
알렉스는 다시 수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키요시가 보고 싶다 하던 수국의 윤곽이 이제야 뚜렷해졌다. 알렉스는 풋풋한 사랑의 기운을 머금은, 아직은 어린 소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여야 했구나. 네가 보고 싶어 하던 수국은.”
키요시는 대답대신 그저 웃었다.
그 웃음에 화답하듯 살며시 불어온 바람에 수국이 살랑거렸다.
* * *
미국에서의 날짜도 바뀌어 명실상부 키요시의 생일이 되었을 때도 키요시의 휴대폰은 마찬가지로 시끄럽게 울어댔다. 일본 날짜에 맞춰 보냈던 메시지 내용 앞에 미국, 혹은 진짜, 정말로 라는 단어들이 추가되어 다시 날아왔다. 키요시는 차근차근 그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 주었다. 손이 커서 유독 메시지 작성이 느린 그였지만 한명도 빠짐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대화창을 내려가던 키요시는 코가네이에게서만 연락이 없는 것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고 일어나서도 코가네이에게서 연락이 없으면, 먼저 인사를 해볼까. 어제 아침에 찍은 수국사진을 보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같이 수국을 보고 싶다고 한다면, 괜한 욕심일까.
키요시는 기분이 싱숭생숭해져 일기장과 같이 둔 작은 앨범을 꺼내 들었다. 미국에 오기 전 미토베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 앨범의 반은 세이린 농구부원들의 사진이 가득했고 나머지 반은, 코가네이의 사진으로 차 있었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 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자연스럽게 나온 사진이 또 반. 그 사진을 천천히 넘겨가던 키요시의 손이 마지막장은 쉬이 넘기지 못했다.
마지막 장에는 시합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서로 기대어 잠이 든 저와 코가네이의 사진이 있었다. 키요시는 그 사진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여전히, 그가 좋았다.
처음엔 그저 귀엽다는 생각뿐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이제 막 농구를 시작한 아이. 과묵한 미토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부터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코가네이는, 또래에 비해 너무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던 자신과 다르게 항상 밝고 활기찬 소년이었다. 자신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더 눈길이 갔던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작은 관심은, 코가네이가 무겁게 저를 괴롭히던 고민을 아무렇지 않게 해소해준 시점부터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커져간 감정은 서로 비에 흠뻑 젖었던 그날, 그 싱그러웠던 수국다발처럼 제 모습을 피워냈었다.
새삼 스스로 감정을 자각했던 순간을 떠올리니 오랜 시간 조용히 품고 있던 마음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설레게만 느껴졌다.
키요시는 졸린 눈을 비비며 대화창에 한자 한자, 글자를 만들어냈다.
『보고 싶다.』
『수국.』
『코가는 더 보고 싶고.』
이미 보내버린 메시지를 다시 읽으며 잠시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던 키요시는 휴대폰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벌렁 드러누웠다.
어제 알렉스와 수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오늘이 생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유독 코가네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다. 차근차근 코가네이와의 추억을 되짚어가던 키요시는 합숙 때 같이 들어갔던 온천을 떠올리고는 슬그머니 팔로 눈을 가리며 돌아누웠다.
그때, 코가네이가 묻지도 않았던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은 반 충동적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없는, 단둘이 존재하는 온천에서 물에 젖은 코가네이의 살결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처음엔 그저 그리 좋아하지 않던 수국을, 코가네이와 함께 본 덕분에 좋아하게 됐다는 이야기만 하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그때 보았던 발간 코가네이의 피부와 정신을 잃은 코가네이를 옮기느라 다급하게 닿았던 살결의 감촉만 떠올라 키요시는 생각을 멈추고 얼른 자기로 했다.
그렇게 억지로 잠을 청해서인지 키요시는 평소에는 잘 꾸지도 않는 꿈을 꾸었다. 아직 앳된 티가 물씬 풍기는 리코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우리 사귈 수 있을까? 같은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한 이유가 뭐야.’
스스로가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 대답을 들은 리코가 까르르 웃는 소리만 들렸다.
‘코가네이 군이 날 좋아하는 거 같아서? 그래, 키요시 군이 코가네이 군을 좋아한다는 건 방금 걸로 잘 알겠어. 그리고 그 사랑에 눈이 멀어 엄청나게 잘못짚었다는 것도. 음, 그러게. 그럼 일단 우리 둘이 사귄다는 식으로 얘기 한번 해볼까? 코가네이 군이 어떤 반응인지 궁금하지? 괜찮겠냐고? 뭐 어때. 사귄다고 해도 정말 연인처럼 행동할 것도 아닌데.’
리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웃었다. 장소는 어느 새 둘이 함께 점심을 먹던 뒤뜰로 바뀌어 있었다.
‘코가네이 군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어?’
‘어려울 거야,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텟페이 혼자면 힘들 거 같으니까 언제든 도와줄게. 마음이 이어져 사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함께 지내면서 가까워졌잖아.’
‘코가네이 군은 그런 감정에 둔하니까-텟페이가 더 있는 그대로 부딪치는 게 좋을 거 같아. 안 그러면 평생 모를걸?’
‘나도 텟페이 좋아해. 내가 텟페이의 첫 번째가 아닌 것처럼, 텟페이도 내 첫 번째는 아니지만.’
작지만 강인한 소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순서는 뒤죽박죽이었지만 모두 키요시를 위한 말이었다. 키요시는 멍한 정신으로 일어나 앉아 리코와의 대화창을 찾았다.
『리코, 항상 고마워.』
답장은 기다리지 않았다. 지금 이곳이 약간 늦은 아침이니 일본은 한밤중일 것이다. 오늘도 아침 연습이 있으니 분명 일찍 잠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키요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기지개를 폈다. 꿈을 잔뜩 꾼 덕분에 몸이 찌뿌둥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평소보다 느긋하게 일어난 덕분인지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오늘은 재활 훈련도 일찍 끝나는 날이니 느긋하게 장을 보고 알렉스를 초대해 조촐하게 생일파티를 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키요시의 생각을 먼저 읽어냈는지 알렉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키요시 Happy Birthday! 저녁에 생일 선물 전해주러 갈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일본의 네 친구들에게 부탁받은 것도 있지롱! 아 먹고 싶은 거 있어? 사갈까?』
자신은 따라가기 힘든 활달한 분위기의 메시지를 읽고 답장을 하면서 키요시는 쓰게 웃었다. 얼핏 확인한 코가네이와의 대화창은 자신이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그대로였다. 코가네이는 그 메시지를 읽었을까, 아직 안 읽었을까. 키요시는 어쩐지 겁이 나 저녁에 제대로 확인하기로 했다.
재활 훈련은 언제나처럼 별 탈 없이 끝났다. 이대로만 가면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거라며 제 일처럼 기뻐하는 트레이너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 키요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장을 보았다. 이미 익숙해진 목발에 의지한 채로도 매우 수월한 움직임이었다.
상태가 매우 좋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몰라도 얼른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를 보고 싶다 생각할 때면 언제나 드는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키요시는 생일 축하 케이크로 바움쿠헨을 샀다. 딱 바움쿠헨만 사 돌아오면서 뒤늦게 이 위에 초를 어떻게 꽂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운데에 난 구멍에 아로마 향초를 하나 피우면 괜찮겠거니 싶었다. 어차피 제 손으로 꾸미는 생일상이었다. 본인이 만족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나 싶어 키요시는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나무, 무슨 나무, 신경 쓰이는 나무∼.”
스스로를 소개할 때 부르던 오래 된 CM송을 고장 난 라디오처럼 계속 반복해 흥얼거리던 키요시는 자신이 완성한 파스타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허리를 곧게 폈다. 혼자 지내는 사이에 꽤 많은 요리를 능숙하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적당히 음식 준비가 끝났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앞치마를 벗으며 확인한 인터폰 화면에는 당연하게 알렉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스페어 키를 가지고 있어 제 집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그녀로서는 드물게 예의를 차린 행동이었다. 아니면 열쇠를 잃어버린 걸지도.
키요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하얀 수국 한 다발을 들고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수국을 보고 반사적으로 멈칫 한 키요시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오, 아니아니, 이건 내 거야.”
“네?”
“내가 선물 받은 거거든. 키요시 군 거는 이거랑….”
알렉스가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아담한 사이즈의 캐리어를 요령 좋게 밀어 넣었다. 그 가방을 얼떨떨한 시선으로 보던 키요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알렉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알렉스는 수국으로 입을 가리고 잠시 웃더니 아직 다 열리지 않은 문을 활짝 밀어냈다.
“이게 메인 선물!”
알록달록, 갖가지 색으로 물든 커다란 수국 다발이 키요시 앞에 서 있었다. 키요시가 우와, 멍청한 음색으로 감탄사를 내뱉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수국 뒤에서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키요시, 생일 축하해! 깜짝 놀랐지?!”
“코…가?”
“응! 바다 건너 날아온 코가네이님입니다~!”
“어, 정말로?”
제 눈앞에 있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키요시가 바보처럼 눈을 껌뻑거리다 두 손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코가네이는 장난이 성공한 아이처럼 웃으며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 역시 코가네이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가네이는 힘겹게 안고 있던 커다란 수국 꽃다발을 키요시에게 안겨주었다. 그 꽃을 받아 안고서야 지금 이 상황이 사실임을 받아들인 키요시가 놀라움과 감격이 범벅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코가, 너 학교는?”
“응? 당연히 땡땡이 쳤지.”
당당한 코가네이의 대답에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던 알렉스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키요시 홀로 이 세상 진지함을 다 끌어 모은 표정이었다.
“그럼 어떡해. 고3인 중요한 시기에.”
“에이, 괜찮아. 감독이 나 수업 빼먹은 부분 철저하게 가르쳐준다고 했거든. 부모님이랑 선생님한테도 다 허락 받고 온 거니까. No problem!”
코가네이는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옆에서 배를 잡고 소리 없이 웃어대던 알렉스가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는 코가네이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코가네이에게 작은 쇼핑백 하나를 건네준 알렉스는 찡끗 윙크를 해보였다.
“이제 그만 뜸 들이고, 또 준비한 선물 주는 게 어때? 아, 내가 없는 편이 좋겠구나. Sorry, Sorry∼."
“아, 알렉스 씨!”
“선물이 또 있어?”
“그럼그럼, 근데 내가 있으면 아무래도 안 줄 거 같으니까 얼른 갈게! 그럼 생일 축하해, 키요시 군! 다음에 보자!”
태풍처럼 그 장소를 휘저은 알렉스는 바람처럼 빠르게 가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키요시와 코가네이 사이로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키요시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은 코가네이를 얼른 안으로 안내했다. 알렉스가 밀어 넣은 아담한 캐리어는 아무래도 코가네이의 짐이었던 모양이다.
단출한 거실에 놓여있는 작은 소파 옆에 캐리어를 놓은 코가네이는 그 위에 살짝 걸터앉아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많이 놀랐어?”
“응, 진짜 놀랐어.”
“헤헤, 작전 성공.”
코가네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작게 브이를 만들어보였다. 수국 다발을 끌어안은 채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키요시가 제 얼굴을 숨기려는 것처럼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보며 코가네이는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길게 비행하는 거라 수국을 갖고 오진 못해서 여기 와서 샀어. 외국 수국은 색이 진짜 다양하더라, 모양도 그렇고. 따로 만들어낸 품종일까? 일본에서 흔하게 보던 거랑은 달라서 신기했어. 그치?”
“응….”
대답을 하는 키요시의 목소리가 수국 사이에 묻혀 먹먹하게 들렸다. 코가네이의 시선이 아련하게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오면서 알렉스 씨한테 들었는데…생일 선물로 좋아하는 애랑 수국 보고 싶다고 했다며?”
“아, 응……. 그래서 이렇게 코가가 와주니까 참, 좋다.”
수국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겨우 든 키요시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말없이 미소만 지은 채 묵묵히 듣고 있던 코가네이는 천천히 일어나 키요시 앞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 이번에는 반걸음의 거리가 아니라 수국 한 다발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나도….”
“응?”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일에 나랑 같이 수국 보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미국까지 왔어. 왕복 비행기 값 버느라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이랑 선생님 허락도 열심히 받아내고. 좋아하는 사람이랑 연락을 길게 하면 나도 모르게 생일에 보러 간다고 말해버릴 거 같아서 열심히 참고. 이야, 지금 생각하니까 이래저래 참 힘들었다. 나도 참, 할 땐 하는 남자라니까.”
홀로 말하고 홀로 감탄하는 코가네이의 말을 따라가지 못해 멍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던 키요시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코가,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
코가네이는 새초롬하게 입을 다물고 뜸을 들이다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매우 조용한 거실에 진지하게 낮아진 코가네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도, 키요시가 좋아.”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같이 수국을 보고 있을 때 말해주고 싶었어. 고집 부려서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말고, 웃어줘, 응?
코가네이는 팔을 뻗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키요시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키요시는 작년에 있던 시합에서처럼, 자신이 우는 줄도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 눈만 깜빡였다. 아까 수국을 안고 있던 코가네이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저를 마주한 키요시에게 코가네이는 웃으며 다시 고했다.
“좋아해, 키요시.”
키요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떻게든 눌러 참으려는 울먹임이 목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키요시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테, 텟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코가네이는 그 말에 갑자기 수줍어졌는지 볼을 긁적였다.
“응, 그럼 나도, 신지라고 불러줘. 텟페이.”
키요시 텟페이. 눈앞에 있는 남자를 칭하는 이름의 다른 한 조각일 뿐인데도 어쩐지 무척이나 가슴 떨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이름을 부를 때와는 매우 다른 느낌. 코가네이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부분을 꾹 눌렀다. 제 심장에서 피어난 수국이 굵은 빗줄기 아래에서도 싱그럽게 빛나는 것처럼, 강한 기운이 샘솟았다. 그 기운은 어느새 코가네이의 양 볼을 발갛게 물들여 놓고 있었다.
붉은 물감이 아름답게 번져가는 것 같은 그 광경을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바라보던 키요시가 결국 코가네이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덕분에 그의 품에 있던 수국에 완전히 파묻히게 된 코가네이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코가네이는 그 여름날, 둘을 잔뜩 젖게 만든 그 빗속에서 저를 잡은 키요시의 온기와 그 전부를 아우를 것처럼 퍼지던 수국향만이 제 감각을 지배하는 것 같았던 그때, 그 기분을 다시금 느꼈다.
키요시가 코가네이의 몸을 살짝 밀어내자 그 중간에 위태롭게 자리했던 꽃다발이 파삭,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졌다. 오색찬란한 수국 꽃잎들이 이리저리 흩날리며 둘의 발아래를 그림처럼 물들였다.
그렇게 꽃잎이 흩날리는 사이에 두 사람의 입술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코가네이는 제 입술에 닿은 부드럽고 뜨거운 감촉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천천히 감았다.
갈 곳을 잃은 코가네이의 손이 제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쥔 키요시의 팔을 잡았다. 그 온기를 느낀 키요시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촉촉하게 젖은 코가네이의 입술을, 엄지로 느리게 매만지던 키요시가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코가네이의 시선을 찾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코가네이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입가에 닿은 키요시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신지, 키스, 해도 돼?”
코가네이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키요시의 목에 제 팔을 감았다. 그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 있는 힘껏 발돋움을 했더니 다리가 짜르르 저려왔기 때문이다. 코가네이는 키요시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기대고 살풋 웃었다.
“그럼 방금 한 건 뭐였는데?”
키요시는 코가네이를 마주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곧 대답이었다. 서로 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이루어진 입맞춤은 서로의 숨결을 주고받으며 길게 이어졌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같이 비를 맞았던 그날처럼, 눈가에서 비를 품은 수국의 향이 났다. 긴 시간,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놓은 감정이 이제야 한 데 어우러져 보랏빛 꽃을 피워낸 모양이었다.
그 여름날, 함께 보았던 자양화처럼, 연약하면서도 강한 꽃을.
그 여름날의 자양화 (終)
키요시 생일을 맞아 작년 키요시 생일 기념으로 적었던 배포글을 올려봅니다.
워낙에 마이너한 커플이라 소량 배포하면서도 과연 찾으시는 분이 계실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행복했습니다.
그때 찾아주셨던 분들도, 지금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도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키요시 생일 축하해!!!!
원 배포본에 들었던 후기는 너무 구구절절 길어서 이 짧은 글로 후기를 대신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 같이 목금을 팝시다...(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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