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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의 농구]
카가미 타이가 x 키세 료타
*오타多 비문多 주의
*급전개 주의
*캐붕 주의
키세야 생일 축하해!!!! 누나가 정말 사랑해!!!ㅠㅠㅠㅠ
“이번 달 18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아, 벌써 그렇게 됐군요.”
“……응? 무슨, 날인데?”
일요일이네. 햄버거를 먹던 카가미가 뜬금없이 터져 나온 키세의 말에 달력을 확인하곤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키세는 감자튀김으로 카가미를 가리키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샤라라한 남자가 태어난 날임다!”
“누구, 생일이야?”
카가미는 여전히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대화 흐름이면 어지간히 눈치 없는 사람도 대충은 때려 맞출 수 있을 텐데. 뭐, 이런 반응도 카가미답다고 해야 할까. 쿠로코는 키세의 징징거림을 받아내느라 질린 표정으로 햄버거를 씹어 먹는 카가미를 보고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새학기에 적응하고, 신입부원이 들어온 새로운 농구부에 적응하고 훈련을 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는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제 곧 키세 군의 생일이네요. 혹시 갖고 싶은 거…….”
“잠깐.”
“……있으면, 네?”
자연스럽게 선물에 대한 화제를 꺼내려던 쿠로코는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키세의 말에 입을 다물고 눈만 깜빡였다.
키세는 얄미울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나, 쿠로콧치 생일 때처럼 다 같이 모여서 파티하고 싶슴다!”
“아, 네…….”
“뭐예요! 이런 떨떠름한 반응은!”
너무해!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으면서 말은 잘한다. 키세는 웃는 얼굴 그대로 불만이 담긴 입술만 비죽비죽 내밀다가 휙, 조용히 햄버거만 먹고 있는 카가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뜨거운 시선을 받게 된 카가미가 잠시 햄버거가 목에 걸린 것처럼 기침을 했다. 키세는 그 기침이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당당하게 외쳤다.
“그러니까, 그날 카가밋치 집에서 내 생일파티를 할 검다!”
“뭘 멋대로 결정하는 거야!”
“꼭 오세여, 쿠로콧치!”
“사람 말 좀 들어!”
이 폭탄 발언을 하기 위해 도쿄까지 온 거로군. 쿠로코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둘을 보고 말없이 셰이크를 마셨다. 마시기 좋게 녹은 셰이크를 입 안 가득 채워 천천히 녹여 먹던 쿠로코는 두 사람 모르게 조용히 일어났다. 존재감이 강한 둘이 서로 열띤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인지 키세와 카가미는 쿠로코가 자리를 뜨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물론 쿠로코도 그럴 것이라 확신하고 일어난 것이지만.
‘가끔은 이런 배려를 하는 것도 좋겠지요.’
쿠로코는 패스트푸드점을 나서기 전, 둘을 따스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솔직하지 못한 둘은 여전히 무의미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마 곧, 카가미가 굽히는 것으로 저 설전은 끝날 것이다.
어렵지 않게 승패를 점친 쿠로코는 해가 저물어가도록 가시지 않은 초여름의 더위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제, 왜 말도 없이 사라져서 사람 놀라게 하냐.”
“키세 군이 저 없다고 바로 가던가요? 아쉬웠겠네요.”
“무, 무슨 소리야.”
다음날, 아침 연습.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까지 가는 도중 쿠로코를 발견한 카가미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저런 말을 했다. 카가미의 반응을 이미 훤히 예상하고 있었는지 쿠로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로 그 말을 받아쳤다. 카가미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으로 한 걸음 앞서 나갔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뭐가?”
“키세 군, 생일파티 말입니다.”
쿠로코는 자신의 질문에 자연스럽게 느려지는 카가미의 옆에 서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가미의 얼굴에는 어쩐지 머쓱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세간에서는 솔직하지 못한 표정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카가미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곧게 저를 응시하는 쿠로코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시선을 피하다가 툭 내뱉듯 말을 꺼냈다.
“키세가 생일선물 필요 없으니까, 제발 부탁한다고 해서…그러기로 했어.”
너무 뻔한 결과였다. 카가미의 고개가 끄덕여지기까지 키세가 얼마나 많은 사탕발림을 하고 아양을 떨었을지 쿠로코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의 키세를 떠올린다면 그 분위기가 어땠을지 능히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쿠로코는 어색하게 굳은 카가미의 볼 위에 떠오른 희미한 열기를 놓치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노라 말하고 있지만 키세가 굳이 제발이라 매달리지 않아도,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 카가미의 무의미한 고집이 금세 꺾였으리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둘 옆에서 매우 긴 시간 지켜봐온 쿠로코였다. 그들의 감정이 알게 모르게 변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하다. 인간관찰이 취미인 쿠로코이니 더더욱.
쿠로코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계속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카가미 앞에 비스듬히 섰다. 카가미가 의아한 얼굴로 쿠로코를 마주했다.
“이제 슬슬 전해도 되지 않을까요. 카가미 군이 키세 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카가미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떡 벌어진 입에선 쉬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경악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쿠로코는 그 교과서적인 리액션에 잠시 소리 없이 웃었다. 카가미는 그 웃음에 민망한 듯 금세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너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어.”
“그랬습니까.”
“거기에, 나 숨기는 것도 잘 못하니까.”
“그렇죠.”
“여기선 예의상 그렇지 않다고 답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카가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쉬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쿠로코가 마음에 들어 하는, 굳은 결심과 각오로 가득 찬 카가미의 모습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키세 생일에, 다 말할 생각이었어.”
카가미는 진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제 각오를 전했다. 쿠로코는 큰 시합을 앞두고 있을 때보다 더 긴장된 것처럼 보이는 카가미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에게는 아마 최고의 생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쿠로코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체육관에 들어서기 전 재빠르게 어딘가로 메일을 날렸다.
“쿠로콧치!”
“안녕하세요, 키세 군.”
“쿠로콧치가 먼저 만나자고 해준 거 엄청 오랜만이라 저 감격했슴다.”
키세는 정말 우는 것처럼 손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쿠로코는 아무 변화 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여러 번의 연습경기로 카이조 고교 주변도 조금 익숙해진 차였다. 자연스럽게, 두어 번 와본 마지버거로 향하자 키세가, 마침 선배에게 쿠폰을 받았다며,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쿠로코의 뒤를 따랐다.
선배가 줬다는 쿠폰은 당연하게 셰이크로 바뀌어 쿠로코 앞에 놓였다. 쿠로코가 만나자고 한 사실이 정말 기쁜 모양인지 키세는 쿠로코를 발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보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싱글벙글 상태였다. 그렇게 웃으며 시답잖은 제 근황을 줄줄 늘어놓던 키세가 햄버거를 반 정도 먹고 나서야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임까? 왜 보자고 한 거예요?”
“참 빨리도 묻네요.”
키세가 찔끔한 얼굴로 물을 마셨다. 쿠로코는 셰이크가 녹도록 빨대를 휘휘 저으며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결국 카가미 군 집에서 파티를 하기로 한 모양이더군요.”
“아, 역시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물론 조금 억지를 부리긴 했지만, 카가밋치도 나름 좋게 승낙해줬으니…….”
“정말인가요?”
키세는 대답 대신 눈동자만 굴렸다. 에헤헤, 하고 난처한 웃음을 흘리는 게 딱 대답을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모양새라 쿠로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 키세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키세는 쿠로코의 눈치를 보며 감자튀김을 입에 넣었다. 평소보다 한참을 씹어대는 느낌이었다.
“카가미 군이 바보같이 사람이 좋다고 키세 군 마음대로 그렇게 밀어붙이면 안 됩니다.”
“그런 게……아님다.”
거세게 반박하려던 키세의 말이 급격하게 힘을 잃었다. 키세는 조금 전까지 반짝거리던 모습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키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어느 화보에나 나올 것 같은, 뭇 여성들이 본다면 노란 환호성을 지를 만한 모습이었다. 노란 환호성이라, 제 맞은편에 앉은 남자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단어라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진짜 그런 거 아녜요.”
“네, 알고 있습니다.”
혼이 나는 어린이처럼 시무룩하게 말하는 키세에게 쿠로코는 자애로운 선생님처럼 대답했다. 키세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쿠로코는 컵을 흔들어 얼마 남지 않은 셰이크의 양을 가늠해보았다. 키세의 기색을 살피느라 너무 빨리 마셔버린 감이 없지 않았다. 쿠로코는 컵을 다시 내려놓고,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키세의 시선을 마주했다.
“키세 군은 예전부터, 좋아한다는 감정 숨기는 것을 어려워했으니까요.”
“……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카가미 군에 대한 감정을 감추려고 할 때마다 저에게 달려드는 것 이제 그만 두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키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키세는 오늘 오전 중, 카가미가 그랬던 것처럼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토해내는 숨결이 목소리를 막아 거의 들리지 않는 말을 대충 유추해보자면 ‘어, 언제부터…?’ 정도일까. 쿠로코는 얼마 남지 않은 셰이크를 아껴 마시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꽤 됐습니다. 이제 슬슬 말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키세는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쿠로코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그렇군요. 라고 대답했다. 키세의 표정이 조금 웃기게 바뀌었다. 키세는 약간 토라진 얼굴로 얼마 남지 않은 햄버거를 입에 넣고 포장지를 마구 구겼다.
키세는 잠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끄러미 쿠로코를 보았다. 다채롭게 변하던 표정은 어느 순간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키세는 그런 얼굴로 슬며시 웃었다.
“어차피, 제 생일에 다 말할 참이었슴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그 말은 제가 아니라 카가미 군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키세는 잠시 이해를 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대다가 이내 포기한 것처럼 밝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작은 행동마저도 꽤나 요란한 느낌을 내는 인물이었다. 쿠로코는 오늘의 볼일을 모조리 끝마치고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남은 셰이크를 쭈욱, 빨아들였다.
이제 곧 있을 키세의 생일이 그날의 주인공인 키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기대되기 시작했다.
서로 눈치만 보던 두 사람이 조심스러운 한 발을 내딛는 날이 될 테니까.
“그런데 제가 왜 카가미 군과 함께 파티 준비를 해야 하는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아까 다 얘기 했잖아! 그래야 키세가 더 기뻐할 거라고……!”
“카가미 군의 연애 사업을 위해 제 한 몸을 희생해야 하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요.”
“무, 무슨 소리야!”
생크림을 치던 카가미가 자신의 머리색만큼이나 시뻘건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쿠로코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딸기 꼭지를 땄다. 나름 나이를 먹었다고 삶은 달걀 뿐 아니라 다른 간단한 요리도 조금 할 수 있게 된 쿠로코는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되려고 그동안 수많은 식재료 싸웠던 건가 싶었다. 물론 그 중에 제대로 된 요리가 된 아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인데도 쿠로코의 불만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은 분위기에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카가미는 부르르 떨며 그 오싹함을 털어내려는 것처럼 생크림을 저었다. 우유처럼 묽었던 흰 액체가 빠르게 크림의 형태로 부풀어 올랐다.
“저도 농구하러 가고 싶었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렇지만…아오미네와 키세의 원온원이 메인이라며.”
“아오미네 군이 키세 군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선물은 원온원 말고는 생각나지 않네요.”
쿠로코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가차 없는 말을 했다. 카가미도 그렇게 느낀 모양인지 슬쩍 난감한 표정으로 제 파트너를 돌아보았다. 쿠로코는 샐러드용으로 사용할 양상추를 뜯고 있었다. 입으로는 저렇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지만 쿠로코가 기꺼이 키세를 위해 저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카가미는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매몰찬 말과 반응으로 키세의 애정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받아치는 쿠로코지만, 중학교 시절 키세의 교육담당을 했었다는 것 때문인지 그는 자연스럽게 키세의 상태를 살피고 그가 모르게 서포트 하려는 성미가 있었다. 마치 시합을 하고 있을 때처럼.
매우 뒤늦게 그것을 눈치 챘던 카가미가 놀리는 표정으로 ‘너도 꽤 솔직하지 못하구나.’ 라고 했을 때 쿠로코는 무슨 말을 하냐는 것처럼 말간 눈동자로 카가미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었다. 카가미는 그 회피에서 약간의 머쓱함을 읽어내고는 남모르게 웃었다.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자신이지만, 속내를 알기 어렵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쿠로코지만. 길게 호흡을 맞춰온 만큼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파트너로서의 신뢰가 두터워졌다는 느낌이 들어 카가미는 가슴 한 구석이 매우 따뜻해졌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오늘 모든 것을 전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현실감각을 일깨웠다. 쿠로코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전신에 작은 긴장이 흘렀다. 카가미는 쿠로코가 썰어놓은 딸기를 미리 준비해 놓은 케이크 시트 중간에 크림과 함께 채워 넣으면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불안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만큼 묘한 감정이 하얀 생크림처럼 부풀었다.
오늘이 지나면,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카가미가 느끼는 것은 그 변화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감이었다.
“카가미 군.”
“……응?”
“아니, 갑자기 아무 말도 없길래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싶어서요.”
“미안 잠시 집중하느라.”
카가미가 허겁지겁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쿠로코는 어느 새 양상추를 산처럼 손질해놓고 삶은 계란 껍질을 까고 있었다. 까야하는 계란도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쿠로코는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면서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응, 뭔데?”
“키세 군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악!”
순간 손을 삐끗해 겉에 바르던 크림이 어긋나버렸는지 카가미가 단발마를 내질렀다. 카가미는 구시렁대면서 재빠르게 작은 사고를 수습하고 슬쩍 쿠로코를 째려보았다. 쿠로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카가미는 짤주머니에 생크림을 담으면서 작게 대답했다.
“몰라, 대답하기 어려워.”
“너무 많아서요?”
“뭣……!? 하아, 그래…그렇다고 해두자.”
뭔가 많은 말을 하기 싫은 건지 카가미가 힘이 잔뜩 들어갔던 몸을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쿠로코는 작게 웃었다. 처음에는 놀리려고 던졌던 질문이지만 저런 반응에 도리어 흥미가 더 샘솟은 모양이다. 카가미는 쿠로코의 웃음에 다시 바짝 긴장했다. 각오는 했지만 확실히 생각보다 더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일이 없다보니 더 그랬다.
“그러면 키세 군을 처음 좋아하게 된 건 언제인가요?”
“…글쎄. 잘 모르겠어.”
카가미는 시험공부를 할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쿠로코는 포기 하지 않았다. 이 무료한 작업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선 그의 얘기를 꼭 들어야 했다. 안 그러면 계란을 내동댕이칠 거 같으니까.
“그럼 키세 군이 유독 예뻐 보였을 때는요? 아, 전부라는 대답은 NG입니다.”
“너 진짜…답지 않게 이런 화제에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그랬나요?”
쿠로코는 물 흐르듯 대답했다. 카가미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작게 앓는 소리를 내다가 잠시 고심했다. 쿠로코가 자신을 놀리려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리겠다는 선택지는 카가미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카가미는 매끈하게 정돈된 하얀 생크림 위에, 키세를 떠올리게 하는 노란 크림을 정교하게 올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키세를 언제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각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런 만큼 처음에는 그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마 알면서도 무의식으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그 감정은 낯설고 생소한 것이었다.
성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그 관심을 곧 연애로 연결시키지 못하던 카가미였다. 그저 예쁜 것에 눈이 더 가고, 흥미가 있으니 더 자주 본다고만 여겼다. 키세가 표지로 나온 패션 잡지를 농구 잡지와 함께 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신이 아는 인물 중에 확실히 예쁜 축에 속하니까. 모델이라는 것이 궁금하니까. 아는 사람이 농구잡지가 아닌 패션 잡지에 실렸다는 것이 신기하니까. 자주 가는 서점에서 얼마 이상을 사면 생필품을 덤으로 주는 이벤트를 하니까. 처음엔 그저 그런 단순한 이유로 키세가 나온 잡지를 구매했다. 물론 이런 사실을 굳이 키세에게 말하진 않았다. 시끄러울 게 분명하므로.
긴 교제는 아니지만 카가미는 꽤나 빠르게 키세의 성격을 파악했다고 자신했다. 키세가 유독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그 분명한 감정을 겉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자유로운 성격의 남자였다. 자신의 외모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조금 얄미운. 그렇지만 정말로 미워할 수는 없는, 카가미가 정의한 키세 료타라는 인물은 그러했다.
그래서 조금 생소하고, 더 신기했던 걸지도 모른다.
잡지에 있는 키세는, 카가미와 쿠로코 앞에 있을 때와도 농구를 하고 있을 때와도 달랐다. 집에 와서 시간이 남는 김에 그 잡지를 펼쳐보았던 카가미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키세가 표지를 장식하거나 그의 이름이 표지에 크게 박혀 눈에 띄었을 때는 꼬박꼬박 잡지를 샀었는데 그날 봤던 컷은 그 동안 봐왔던 키세의 어떤 사진들보다 카가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가을 분위기가 나는 옷을 입고 짙은 색의 우산을 들고 있던 키세의 표정은 카가미가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쿠로코에게 말하자 쿠로코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카가미를 보고 웃었다. 카가미 군의 느낌을 제가 온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설명을 조합해보면 아마 ‘우수에 찬 표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쿠로코는 수업시간에 사용하는 사전을 펼쳐 ‘우수(憂愁)’라는 단어를 찾아주었다. 근심과 걱정이라는 뜻에 카가미의 표정이 절로 어두워졌다.
키세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걱정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그 걱정을 자신이 덜어줄 수는 없을지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런 카가미의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그날의 하늘이 서서히 어두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카가미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우산 안 가져왔는데.”
일기예보에도 나오지 않은 갑작스러운 비였다. 지나가는 소나기일지도 모른다. 카가미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섰다. 평소 예비 우산을 챙겨가지고 다니는 쿠로코는 오늘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연습도 빠지고 일찌감치 귀가해버린 뒤였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다른 부원들은 얼른 달려가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는 게 낫겠다며 저 세찬 비를 맞으며 달려가 버렸고.
하지만 카가미는 그들을 따라 빗속을 달려가기를 주저했다. 이 비를 맞고 갔다가 내일 감기에 걸려버리면 어떡하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중학교 3학년 이맘때쯤, 더운 여름이니까 비 정도는 맞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 쫄딱 젖은 채 돌아와 홀로 며칠을 끙끙 앓은 뒤로, 카가미는 어쩐지 비를 맞고 돌아가기가 두려웠다. 평범한 비도 아니고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퍼붓는 세찬 비여서 더더욱 꺼려졌다.
“그렇다고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고.”
그렇게 혼자 푸념을 뱉어내고 있을 때, 그 굵은 빗줄기 사이로 짙은 색의 우산이 보였다. 학교에서 밖으로 나가는 그림자는 있어도 밖에서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이는 그 우산의 주인이 유일해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다가 저도 모르게 크게 외쳐버렸다.
“키세?!”
“아, 깜짝이야. 쿠로콧치도 아니고 갑자기 사람 놀라게 하지 마요. 그나저나 쿠로콧치는요?”
키세는 당연하게 쿠로코를 찾았다. 키세가 쿠로코를 만나러 세이린에 오는 것이 하루이틀도 아니었기에 카가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갔어.”
“에엑, 갑작스러운 비라 쿠로콧치 우산 안 가져왔으면 씌워주려고 일부러 왔는데.”
“시간도 많네.”
“오늘은 근처에 일이 있었으니까 겸사겸사임다. 겸사겸사. 카가밋치 겸사겸사란 말이 뭔지는 알아요?”
“알아!”
키세는 카가미를 놀려놓고 혼자 까르르 웃었다. 카가미는 눈을 가늘게 떠 그 웃음을 보다가 슬그머니 그가 쓰고 있는 우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잡지에서 봤을 때와 비슷한 우산이었다. 짙은 색의, 커다란 우산. 카가미는 쿠로코가 알려준, 우수에 찬 느낌을 다시금 상기하며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키세는 그런 카가미의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럼까? 아, 혹시 카가밋치 우산 안 가져왔슴까?!”
“응.”
“헤에, 그래서 혼자 남아서 처량 맞게 하늘만 보고 있었군여.”
키세는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우산을 돌렸다. 우산 끝에 맺힌 빗방울이 어지러이 튀었다. 카가미는 그 호들갑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은 우울한데 그 우울함을 감추려고 더 저렇게 밝은 티를 내는 건 아닐까.
쿠로코가 이미 집에 가 학교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키세는 쉬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산을 접고 카가미 옆으로 오지도 않았다. 자신의 우산을 같이 쓰자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키세는 말없이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카가미 역시 말없이 시선으로만 키세의 뒤를 좇았다. 잠시간 둘 사이에 자리하는 건 세찬 빗소리뿐이었다.
“아, 달팽이.”
길가에서 벗어나 화단에 당도한 키세는 잎사귀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달팽이를 발견했는지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커다란 우산에 그의 큰 몸이 다 가려져 카가미의 시선엔 짙은 남색의 우산만 덩그러니 보였다. 그 사실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 카가미는 천천히 그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세는 멀리 가지 않고 딱 계단이 끝나는 지점, 처마가 아슬아슬 가려주는 그 경계 가까이에 있는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계단에 앉아 감상하기 좋았으리라.
조금 멀찍이 있던 키세와 가까워져 우산에 가려져 있던 키세의 모습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카가미는 순간, 가려져 있던 키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게 되었을 때, 키세가 짓고 있을 표정이 잡지의 그것과 흡사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피어나는 감각을 느꼈다. 그 느낌은 어쩐지 조금 충동적인 것도 같았다. 예고도 없이 내린 이 세찬 비처럼, 그렇게 예고 없이 카가미의 심장을 세차게 내리쳤다.
“키세….”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조금 젖은 것처럼 들렸다. 우산을 거세게 때리는 소리에도 용케 카가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키세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카가미의 우려와 달리, 짙은 우산에 가려져 있던 키세의 얼굴에는 말간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푸르른 녹음이 머금은 빗방울과도 같은 미소였다. 키세는 그렇게 투명한 얼굴로 웃었다. 카가미는 순간 자신이 천둥소리를 들은 건 아닌가 싶었다. 아니, 온몸에 전류가 흐른 느낌이니 가까이에 번개가 떨어진 걸지도.
“왜요? 아, 우산 씌워달라고?”
키세는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는 카가미에게 저 혼자 멋대로 말해놓고는 키득키득 웃었다. 어떡할까, 내가 우산 씌워주면 뭐 해줄 건데요? 혼자 조잘조잘 떠는 목소리가 빗소리보다 더 촉촉하게 들렸다. 카가미는 물웅덩이에 수없이 생겨나는 파문처럼 흔들리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을 저도 모르게 입에 올리고 말았다.
“아, 지렁이다.”
“끼아악! 어디?! 어디에!?”
“네 발 옆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발 주변을 살피던 키세가 비명도 단어도 되지 못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듯 카가미 옆으로 달려왔다. 반쯤 기어온 것도 같다. 그가 펄쩍 뛰면서 놓친 커다란 우산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를 내며 비와 함께 젖어갔다. 키세는 카가미의 팔에 매달려 길 위에서 꿈틀대는 지렁이를 혐오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긴 하지만 그렇게 추운 건 아닌데 키세의 얼굴은 반쯤 파랗게 질려 있었다. 카가미는 2호를 대하는 자신의 얼굴이 대충 저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키세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어 간신히 소리를 토해냈다.
“내가 있는 곳은 시멘트, 라서 방심했슴다.”
“너 울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우산 가져다줘요. 카가밋치 때문에 놓쳤으니까!”
우산을 놓치는 바람에 키세의 하얀 교복셔츠와 노란 머리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카가미는 이미 젖은 네가 가는 게 낫지 라고 대답하려다가 순순히 그 빗속을 달려 우산을 구해왔다. 키세는 새초롬한 얼굴로 우산을 받아 털었다. 그 안쪽이 마를 때까지 키세도 꼼짝없이 이곳에서 카가미와 비를 피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키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 그냥 얼른 갈걸.”
“그러지 그랬어.”
카가미의 말에 키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카가미는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그 큰 몸을 움츠렸다. 키세는 부루퉁한 얼굴로 카가미를 보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세웠다.
“카가밋치는 왜 나한테 우산 씌워달라고 안 한 검까?”
“어?”
“내가 그대로 그냥 가버렸으면 카가밋치 그냥 비 맞고 가려고 했어요?”
카가미는 입을 다물었다. 거기까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키세에게 우산을 씌워달라고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키세를 보기에 바빴다. 그 잡지의 표정과 지금 눈앞에 있는 키세의 표정을 겹쳐 보거나 다른 점을 찾거나. 혹시 알게 모르게 내비치는 걱정거리가 있을까 싶어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거 같다.
카가미는 말없이 키세 옆에, 가방 하나가 놓일 정도의 공간을 남겨두고 털썩 주저앉았다. 비는 그 사이에 조금 약해졌다. 이런 비면 조금 맞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카가미나 키세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나란히 앉아 하늘만 보았다. 비가 오니 당연하겠지만 이제 시간도 늦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점점 짙어지는 어둠뿐이었다.
“키세, 비 맞았는데 춥지는 않아?”
“이정도는 괜찮슴다.”
“우산 마른 거 같은데 얼른 가봐.”
“카가밋치는?”
“비 조금 더 그치면 그때 가야지.”
네 우산, 아무리 크다고 해도 우리 둘이 쓰기엔 작지 않아? 카가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키세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뭐, 이제 곧 그칠 거 같슴다. 소나기니까.”
늦여름의 소나기는 키세의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잠시 후에 완전히 그쳤다. 그럼에도 카가미나 키세, 둘 다 쉬이 움직이질 않았다.
한바탕 소나기가 오고 난 뒤의 여운을 즐기다가 먼저 움직인 건 이번에도 키세였다. 키세는 화단에서 멀찍이 떨어진 길목에서 서서 쭈욱, 기지개를 폈다.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키세는 어쩐지 조금 전 빗속에서 보았을 때처럼 투명한 느낌이었다.
우수에 찬 느낌과 지금의 이 투명한 느낌, 둘 중 어느 것이 더 자신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던 카가미는 어려운 얼굴로 뒷목만 쓸었다.
“키세.”
“……응?”
“뭔가 고민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키세는 아직 계단 위에 서 있는 카가미를 올려다보고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뭔 말을 꺼내나 싶었더니…. 오늘 이상한 거라도 먹었슴까?”
“아니라면, 됐어.”
퉁명스러운 카가미의 대답에 키세가 다시 웃었다. 평소에 보던 키세의 웃음이었다. 아니, 조금 다르게 보였던 것 같다. 평소보다 조금 더 반짝였다. 햇살이 비치던 푸른 날에 보던 웃음보다도 반짝이던 미소에서 카가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키세의 우산을 펴 제 앞을 가려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 더위가 슬슬 가시던 늦여름의 일이었다.
“제일 처음으로 키세를 예쁘다고 생각했던 건 역시 그때였던 거 같아.”
말을 마친 카가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작업을 완료한 케이크를 이리저리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거회상에 대한 만족인지 케이크에 대한 만족인지 조금 불분명했다. 쿠로코는 말없이 그 미소를 뚫어져라 바라만 보았다. 뒤늦게 카가미가 의아한 시선을 돌려 쿠로코를 훑었다.
“뭐야, 그 표정은? 거기에 왜 계란을 까다가 멈췄어?”
“아니, 아닙니다. 이건 다 괜히 사랑에 빠진 사람을 들쑤셔 버린 제 탓이니까.”
“무슨 소리야.”
간혹 쿠로코가 저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할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카가미는 언제나처럼 얼굴을 슬쩍 찌푸린 채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이미 준비가 끝난 재료들이 한가득이었다. 쿠로코가 화제를 돌릴 좋은 찬스라 여겼는지 얼른 짜게 식은 표정을 지우고 그에게 다가갔다.
“어제 다 준비해놨던 건가요? 연습하고 와서 시간도 얼마 없었을 텐데…이걸 다 혼자서…?”
“아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걸 하룻밤 사이에 혼자서 하긴 무리지.”
카가미가 부드럽게 웃었다. 쿠로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알렉스 씨가 일본에 왔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 대체 누가 도와줬을까. 그런 의문은 때마침 카가미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 때문에 해결되지 못했다. 쿠로코는 이 문제는 나중에 파티가 끝나고, 천천히 물어보기로 다짐하면서 누군지 모를 상대와 기쁘게 통화를 하고 있는 카가미를 보았다가 슬그머니 자신의 핸드폰을 들었다.
지금쯤이면 키세와 아오미네의 원온원도 대충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아, 이번엔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키쨩, 확실히 전보다 많이 좋아졌는걸. 다이쨩 이긴 횟수 이번이 제일 많아.”
“그치만 결국 아오미넷치가 더 많이 이겼잖아요.”
키세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가 금세 히히 웃었다. 비록 이번에도 아오미네를 넘어서진 못했지만 간만에 한 원온원이 매우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지는 사람이 음료수를 사기로 했음에도 아오미네가 온갖 이유를 가져다붙여 자기가 사러 간 이유도 한몫 했다. 자기 나름대로 키세의 생일을 챙겨주는 방식이 아닐까. 모모이는 벤치에 늘어진 키세에게 미리 준비한 수건을 건네며 생긋 웃었다.
오전부터 내내 말을 꺼낼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는데 아오미네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아주 완벽한 순간이었다. 모모이는 슬그머니 키세의 옆에 앉았다.
“테츠 군한테 들었는데, 오늘 드디어 말할 생각이라며?”
“아……?”
“드디어 고백할 결심을 한 거구나, 키쨩.”
“모못치, 눈이 너무 반짝임다….”
그리고 역시 모못치도 다 알고 있었네요. 키세는 민망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내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긴 건데. 모모이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헤에, 키쨩이 좋아하는 감정을 숨긴다고? 어색하게 웃는 키세의 볼이 약간 붉어졌다. 답지 않게 쑥스러워하는 그 반응에 괜히 더 장난기가 돈 모모이는 상체를 돌려 앉아 본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카가밍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어, 음……귀여운 부분? 솔직하면서 진지하게 반응해주는 점이라거나. 그래도 역시 귀여운 게 제일임다.”
예상과 전혀 다른 이유에 모모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보더라도 남자다운 외모에 다부진 체격, 성격도 매우 화끈하고…아, 개를 무서워하는 부분은 조금 귀여울 수도? 열심히 자신이 아는 카가미의 모습에서 키세가 말하는 귀엽다는 부분을 찾으려 애쓰는 모모이의 모습을 보고 키세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딱히 약속을 잡고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농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움직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게 되었다. 키세는 자신이 이 공원에 도착하기 전 이미 한바탕 농구를 하고 땀으로 범벅이 된 인물들을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쿠로콧치! 미도리맛치!”
“이야, 키세 군. 우리도 있는데 쌈박하게 두 사람만 불러주고.”
“타카오 군이랑 카가밋치에게도 아는 척 할 참이었슴다!”
네 사람을 불러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 줘요. 키세는 일부러 우는 척을 하며 자연스럽게 넷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쿠로코는 언제나처럼 정중한 인사를, 미도리마도 역시나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운 인사를, 잔소리와 함께 건넸다. 키세는 마지막으로 카가미와 인사를 나누고 벤치에 놓여있는 커다란 병아리 인형과 그 주변에 바글바글 놓인 병아리 아이템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와, 오늘은 또 어쩌자고 이렇게 잔뜩 준비한 검까? 그것도 완전 제각각. 미도리맛치 오하아사 보다가 존 건 아니죠?”
뒤에서 타카오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에 미도리마가 당연하게, 그러니까 너는 안 되는 거라고 서두를 열지 않을까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미도리마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키세가 벤치 한쪽에 아슬아슬 걸쳐져 있는 병아리 디자인의 컵을 든 채 고개를 돌리자 미도리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안경만 올리고 있었다. 옆에서 배를 잡고 웃던 타카오가 겨우 웃음을 진정하고 대신 말을 꺼냈다.
“병아리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아는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대. 아침에 이쪽 일부 지역에 정전이 있었거든? 하필 그때 게자리 럭키 아이템 말해주고 있었나봐! 노란 병아…까지만 들었대! 푸하하학!”
“뭐야, 제대로 들었네요. 노란 병아리예요, 게자리 럭키 아이템. 살아있는 동물을 하루 종일 소지하기 어려울 테니 노란 병아리 아이템이면 뭐든 오케이라고 했는데…….”
“뭐라고?”
“아니아니, 신쨩 설마 지금 정말 병아리를 구하러 갈 거라고 말하진 않겠지? 노란 병아리 아이템이면 뭐든 괜찮다고 방금 키세 군이…….”
타카오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럭키 아이템에 대한 미도리마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키세와 쿠로코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타카오도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진짜 병아리를 구하지 못하면 농구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아, 유치원에서 기르는 거 있지 않을까요? 내가 나온 유치원은 그랬는데.”
“맞아, 내가 나온 유치원도 그랬어.”
타카오는 낄낄 웃으면서 앞장섰다. 여기랑 좀 가까우니까 일단 가보자.
그리고 잠시 후, 다섯은 수많은 샛노란 병아리들을 쫓아 이리저리 달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에서 풀려난 병아리들이 유치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안쪽으로 몰던 키세가 빽, 소리를 질렀다.
“거기서 닭장 문을 활짝 다 열어젖히는 멍청이가 어디 있슴까, 미도리맛치!”
이번에는 확실히 자신이 잘못했다는 인식이 있는지 미도리마는 평소처럼 매몰차게 대꾸하지 못하고 재빠르게, 흰 닭을 잡아 올렸다. 빠르긴 하지만 크기가 큰 닭들을 잡는 건 그나마 괜찮았지만 문제는 병아리들이었다. 아무리 우리 쪽으로 몬다고 해도 두세 마리씩 꼭 이탈을 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카가밋치! 그쪽으로 가는 애들 잡아줘요!”
“어? 어어…!”
왠지 모르게 아까부터 바짝 얼어 굳어 있던 카가미가 어색하게 손을 뻗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가미가 자신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 여겼는지 주변을 재빠르게 뛰어다니던 병아리들이 종종걸음으로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카가미의 표정이 더더욱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로 변했다.
“뭐하는 검까?”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그대로 굳어버린 카가미를 뒤늦게 발견한 키세가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카가미는 반 울기 직전이었다.
“못 움직이겠어.”
“카가밋치, 설마 병아리도 무서워하는 건…….”
“그건 아닌데! 아니, 내가 밟거나 터뜨릴까봐 좀 겁나.”
카가미는 뻣뻣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자신의 주변에 있는 병아리들을 살폈다. 키세는 그 모습이 괜스레 귀엽게 느껴졌다. 2호를 보고 겁낼 때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그 작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귀여움이었다. 키세는 쿡쿡 웃으며 카가미 가까이에 있는 병아리를 요령 좋게 한손으로 들어올렸다.
“카가밋치, 손 내밀어 봐요.”
“응? 이렇게?”
“응응, 좀 오목하게 만들고.”
키세는 카가미의 커다란 손 위에, 조심스럽게 병아리를 올려놓았다. 그 순간, 카가미가 바짝 긴장한다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키세는 얼른 카가미의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요. 병아리도 다 느낀단 말예요. 카가미가 어색하게 대답하며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뺐다. 뻣뻣하게 굳었던 근육이 부드럽게 풀리자 그제야 안정감을 느낀 건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불안한 듯 보이던 병아리가 카가미의 손 위에 살포시 앉았다.
“오오, 앉았어. 키세! 병아리가 내 손에 앉았어!”
감격으로 가득한 카가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병아리가 삐약거렸다. 카가미는 혹여 자신이 그 작은 생명을 강하게 쥐어버릴까, 매우 걱정하며 병아리를 우리로 데리고 갔다. 부드러운 노란빛이 귀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제 손에 있던 병아리를 조심스럽게 놓아둔 카가미가 어려운 과제를 끝낸 아이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은 채 돌아왔다.
병아리가 있었던 오른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카가미에게 키세가 다가갔다.
“괜찮았죠?”
“엄청 가볍고, 부드러웠어.”
카가미가 아이처럼 웃었다. 키세는 그 얼굴이 보기 좋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자신과 만나기 이전의 카가미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어쩌면 조금 더 어린 시절의 카가미는 항상 저런 식으로 웃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해프닝이 지나고 미도리마가 어렵사리 병아리를 한 마리 받았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다. 하루가 거의 다 끝나가는 무렵인데도, 미도리마는 럭키 아이템을 제대로 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만족한 듯 보였다.
카가미는 가까이 가진 못하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미도리마의 품에 있는 투명한 케이지를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좁은 곳에 갇히게 된 병아리가 투명한 플라스틱 우리를 부리로 쪼아대는 걸 안쓰럽게 보고 있던 카가미가 갑자기 벤치에 앉아 있는 키세에게 다가왔다.
“카가밋치도 한 마리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뭐? 나는 왜.”
“병아리가 무척 마음에 든 거 같아서 하는 말임다.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잖아요.”
“그랬나?”
자각이 없는 모양인지 카가미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농구할 때 말고, 일상의 카가미를 접할 일이 거의 없던 키세는 계속해서 보이는 그의 의외의 일면에 심장 한 구석이 톡톡 튀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중학교 시절에 산과 계곡으로 곤충이나 가재를 잡으러 다녔다 자랑하던 아오미네와 비슷한 분위기인 거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키세의 머리에 갑자기 따뜻한 무게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카가미의 손이 키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헤집고, 매만지고 쓰다듬은 뒤 처음과 같이, 살포시 떨어져 나갔다.
키세는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돌렸다. 카가미는 조금 전, 병아리를 처음 만졌을 때와 같은 표정으로 키세의 머리를 쓰다듬은 손을 보고 있었다.
“방금, 뭠까?”
“그냥.”
“그냥?”
카가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너도 부드럽네.”
“엥?”
도무지 얘기가 보이질 않았다. 카가미는 키세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상관이 없던 건지 다시 한 번, 키세의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조금 전과 다르게 약간 거친 손길이었다. 카가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색도 그렇고.”
“카, 가밋치?”
“병아리 같아.”
머리 위에서 카가미의 온기가 사라졌다. 카가미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키세는 입만 떡 벌린 채 움직이질 않았다. 지금 뭐지.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야. 붕어처럼 입만 벙긋대던 키세의 얼굴이 매우 서서히 벌겋게 익었다. 우와, 내 반응은 또 뭐야. 키세는 뜨거워진 제 얼굴을 식히려고 셔츠를 펄럭였다.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생수병이 불쑥 내밀어졌다.
“더운가요?”
“쿠, 쿠, 쿠로콧치?!”
“얼굴이 빨갛습니다.”
키세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노을 때문이겠져! 쿠로코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올곧게 저를 응시하는 저 푸른 눈동자가 아직 스스로도 잘 모르는 감정까지 모조리 꿰뚫어보는 느낌이었다. 키세는 풀어낼 곳 없는 이 답답함을 제 옆에 있는 커다란 병아리 인형을 이리저리 잡아 늘리는 것으로 풀어냈다.
키세를 본 카가미가 즐거운 듯 웃는 모습에 다시금 몸에 열이 오른 건,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 때문이라 애써 저를 위로하면서.
“세상에…말로만 듣던, 사랑에 빠진, 순간…….”
“쿠로콧치에게 당첨 막대 받았을 때의 모못치야말로…….”
“꺄아아악! 그때 얘기를 하면 다시 설레잖아! 키쨩도 참!”
“아야, 아야야! 알았으니까 때리지 마요!”
“나참, 뭐하냐?”
“아, 아오미넷치!”
“자, 물.”
“에엑, 오늘은 스포츠 드링크의 기분이었는데!”
“그냥 주는 대로 먹지. 하여간 쓸데없이 귀찮은 성격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오미네는 자신의 몫으로 산 스포츠 음료를 키세에게 주었다. 키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바로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에 괜히 쑥스러워진 아오미네가 우악스럽게 키세의 머리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얼마 전 촬영을 위해 짧게 친 키세의 머리칼 감촉이 무척이나 낯선 듯 아오미네의 표정이 미묘했다. 키세는 기껏 정돈한 머리가 또 망가졌는데도 그저 웃었다. 아오미네가 돌아오면서 다시 살짝 그 둘을 지켜보는 자리로 돌아간 모모이도 조용히 웃었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가슴 떨리는 벨소리를 울려댔다. 모모이가 발갛게 볼을 물들이며 번개처럼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지도 전에 키세와 아오미네는 전화 상대가 누군지 알아버렸다.
“테츠 군!”
“역시나.”
“얼른 와서 밥 먹으라는 전화 아닐까요.”
상대도, 그 상대가 전할 용건도 빠르게 파악한 키세와 아오미네는 서둘러 짐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모모이가 통화를 끝낸 것을 보고, 키세는 자신이 썼던 수건을 모모이에게 내밀었다.
“잘 썼어요, 모못치. 아, 빨아서 돌려주는 게 좋은가….”
“아냐, 키쨩. 그거 내가 주는 선물.”
“네?”
모모이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수건의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붉은 실과 노란 실로 새겨진 이니셜이 있었다. 키세만의 이니셜이 아니었다. 자신과 나란히 있는 다른 이의 이니셜을 본 키세의 얼굴이 슬쩍 물들었다. 키세는 일부러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남들 앞에서 쓰기 좀 그렇잖아요.”
“그럼 집에서 키쨩 혼자 있을 때만 쓰면 되지, 뭐가 문제야?”
모모이가 놀리는 것처럼 말하며 앞장섰다. 키세는 수건에 붉은 실로 새겨진 카가미의 이니셜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난 뒤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진즉에 짐을 챙겨 들고 키세를 기다리고 있던 아오미네가 뒷목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키세.”
“왜요, 아오미넷치?”
“그, 뭐냐……. 오늘 원온원, 즐거웠냐?”
키세는 잠시 대답을 잊고 눈만 깜빡였다. 그 잠시간의 정적을 참지 못한 아오미네가 아님 말고! 거칠게 뱉어내고는 후다닥 멀어졌다. 키세는 그 솔직하지 못한 마음을 느끼고 주체할 수 없어진 입가를 가린 채 쪼르르 그 뒤를 따랐다. 아침부터 묘하게 부풀어 있던 기분이 더더욱 부풀어 올랐다.
모모이, 아오미네와 함께 카가미의 집에 도착한 키세는 자신이 들어서자마자 터진 크래커 소리에 화들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이제는 익숙해진 웃음소리와 조금 오랜만인, 호통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키세는 뒤늦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들어올렸다.
“카사마츠 선배! 미도리맛치랑 타카오 군도!”
오늘 자신의 생일 파티가 있을 거라 전한 메일에 카사마츠도 미도리마도 무척이나 매몰차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여줬던 터라 내심 마음을 접고 있던 키세는 당연하게 와 있는 두 사람을 보고 큭큭 웃었다. 그리고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카사마츠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생일인데 너무하다고 투덜대는 키세는 말과 다르게 내내 웃는 낯이었다.
테이블을 세팅하고 있던 쿠로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키세는 크래커에서 나온 꽃가루를 여전히 머리에 얹은 채 선배들에게 다가갔다. 코보리가 웃으며 그 꽃가루를 털어냈다. 모리야마는 여전히 입을 열 때마다 유감스러움이 묻어났다. 키세와 마찬가지로 졸업한 선배들을 오래간만에 보는 하야카와와 나카무라도 조금 들뜬 표정이었다.
“아, 키세 왔어?”
“카가밋치!”
다용도실에 가 있느라 뒤늦게 얼굴을 내민 카가미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도착한 오늘의 주역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키세는 활짝 웃으며 쪼르르 카가미를 따라 주방으로 갔다. 얼핏 들리는 목소리가 양파그라탕스프를 말한 거 같다. 쿠로코와 모모이는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미소 지었다. 보는 이의 가슴이 더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의 진행은 매우 빨랐다. 우선 점심부터 먹자는 카가미의 말에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 쿠로코의 생일 때와 비슷한 메뉴였지만 그래도 확실히 키세의 입맛을 고려한 메뉴들이 몇 눈에 띄었다. 키세는 저만을 위해 준비된 양파그라탕스프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우와, 잡지에서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인터뷰 한 거 보긴 했지만 정말 좋아하는 거였어?”
“그럼 정말 좋아하는 거지, 안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함까?”
“인터뷰용 대답인 줄 알았지. 키세 군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뭐 그런 걸로.”
타카오의 말에 키세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보다 우선은 저를 위한 만찬 즐기기에 집중하기로 한 키세는 스프를 한 입 먹어보고 풋 웃었다. 치즈 다른 거 썼네. 타카오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키세의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미네랄워터 상표 맞추기가 특기라더니, 그만큼 섬세한 미각이라는 걸까. 그게 아니면…….
타카오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오미네가 타카오의 접시에 있던 음식을 뺏어먹었기 때문이다. 기적의 세대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개성 넘치는 성격인걸까! 타카오는 웃으며 푸념을 늘어놓고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그도 식욕이 왕성한, 한창 때의 남고생이었다.
양파그라탕스프를 깨끗이 비운 키세는 슬그머니 카가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양 볼이 미어지도록 음식을 넣고 씹고 있던 카가미가 잠시 시계를 보더니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아도 키세의 용건을 파악한 모양이다.
“나, 케이크 얼른 먹고 싶은데.”
키세가 맞잡은 양손을 꼼지락대며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긴장으로 굳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얼른 음식을 씹어 삼킨 카가미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벌떡 일어났다.
“좀만 기다려. 이제 다 모이니까.”
“응? 이 멤버가 전부잖아요.”
“정말로?”
따스하게 웃으며 묻는 카가미에게 키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긴장으로 굳었던 얼굴이 지금은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키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던 카가미가 쿠로코를 불렀다. 숨죽이고 키세와 카가미의 교환을 지켜보던 쿠로코가 화들짝 놀랐다.
“케이크 좀 준비해줘.”
카가미의 말에 왠지 모르게 키세가 헛숨을 들이쉬었다.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 걸까. 설마 이제 말하려고 결심한 걸까. 거실을 나서는 카가미를 그대로 따라 나가서……. 그렇게 생각하며 동태를 살폈지만 키세는 진지한 눈으로 쿠로코가 준비하는 케이크를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타카오와 카사마츠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전문가처럼 깔끔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키세를 생각하며 정성껏 만들었다는 느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케이크였다. 쿠로코는 키세의 이름과, 생일 축하해 옆에 자리한 하트를 보고 키세가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 계속 그의 모습을 주시했다. 키세는 희미하게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저까지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쿠로코는 모모이의 표정도 그렇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도닥여주었다. 모모이가 화들짝 놀라 쿠로코를 돌아보았다. 긴장으로 물들었던 모모이의 얼굴이 붉게 풀어졌다.
그 사이로 나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라라, 벌써 다 먹은 거야? 아, 키세칭 생일 축하하구.”
“무, 무라사키바랏치?! 여긴 어떻게……?!”
“와, 다행이네, 케이크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의 인물이 느릿느릿 거실로 들어섰다. 키세는 예상하지 못한 그의 등장에 입만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 뒤로 차분한 목소리가 뒤따라 들어왔다.
“누군가가 꼭 와달라고 부탁하는 걸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거든.”
“아카싯치….”
“사실은, 정식으로 초대를 받고 싶었는데 말이야. 타지에 사는 우릴 너무 배려하느라 그런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네.”
“미, 미안함다.”
키세가 찔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카시는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 아카시와 키세를 제외한 모두가, 그 말의 어디가 농담이냐는 반박을 속으로만 외쳤다.
뒤늦게 거실로 돌아온 카가미는 무라사키바라와 아카시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각오를 다진 이의 얼굴이었다.
이름 때문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자연스럽게,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은 카가미가 하게 되었다. 자신의 나이만큼 꽂힌 초에 붙은 불꽃을 바라보는 키세의 표정은 행복하다기보다는 어쩐지 굳은 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그 진지한 감정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쿠로코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키세,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고 요란한 크래커 소리와 함께 키세의 생일을 축하하는 콜이 이어졌다. 키세는 발그레한 얼굴로 촛불을 끄고 맑게 웃었다.
“모두, 정말 고맙슴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끊은 채 고개를 숙인 키세의 머리를 옆에 앉아 있던 카가미가 툭툭 쓰다듬었다. 키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쿠로코의 속에 자그마한 혼란이 생겨났다.
키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아는 사람도 있지만, 나 이 자리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고백하려고 함다.”
“잉? 뭔데?”
분위기 파악이 늦은 아오미네가 매우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사실은 저, 그러니까…….”
“나랑 키세, 사귀고 있어.”
키세가 말하기 어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자마자 카가미의 목소리가 치고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카가미에게 쏠렸다. 어느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고 뭐라 반응을 하지 못할 때, 한쪽에서 두 목소리가 동시에 경악을 쏟아냈다.
“뭐어어어?!”
“뭐라고요?!”
“엑, 쿠로콧치랑 모못치가 왜 놀람까? 다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맞아, 그러니까 얼른 고백하라고 그렇게…….”
“저는 서로에게 고백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나도! 카가밍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려는 건 줄 알았지!”
네 사람의 시선이 공중을 어지러이 오갈 때, 한쪽에서 우렁찬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하학 못 참겠다!”
“분위기 파악을 하란 것이다, 타카오.”
“으하하학! 신쨩에게만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저기, 이제 케이크 먹어도 돼?”
“이런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으면서, 우릴 초대하지 않으려했다니…정말 서운하네. 아 물론, 이것도 농담이야.”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으니 문제다만.”
“아, 그랬나요. 더 정진해야겠네요.”
“좋아, 키세가 이제 품절됐으니 나에게 더더욱 희망이!”
“오오오! 모(리)야마 선배 파이팅임다!!”
“잠깐, 둘 다 달려있는데 그럼 밤일은 어떻게 하냐?”
말 그대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쿠로코는 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오미네에게 응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키세와 카가미 앞에 당도한 쿠로코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언제부터……?”
“그러니까, 너 생일 지나고…”
“밸런타인데이쯤에요.”
“물론 사귀기로 한 건 2월 말쯤이고.”
“허어….”
자신의 생각보다 더 예전에 이루어진 둘의 관계에 쿠로코는 허탈한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그 옆에 있는 모모이도 마찬가지였다. 그 두 사람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경악’ 그 이외에는 없었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린 쿠로코는 쓰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 허를 찔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이야. 둘 다 어쩜 그 후에 전혀 티도 안 내고.”
다시 봤어. 모모이가 보란 듯이 눈을 흘기곤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에 이끌린 것처럼 키세도 그제야 겨우 웃었다.
“쿠로콧치와 모못치 말에 용기를 얻은 것도 있지만…사실, 모두 앞에서 아무런 사이가 아닌 것처럼 지내는 게 힘들어서 얼른 말해버리고 싶었던 것도 있슴다.”
“맞아, 내가 먼저 우리집에서 파티하자고 말했는데 그러면 다들 의아하게 생각할 거라고 일부러 키세가 다시 말하는 거…이런 거 정말 골치 아팠다고.”
“아, 그러면 그날 제 앞에서 나누던 대화가 다 쇼였다는 거군요. 저 배신감에 좀 떨어도 되겠습니까?”
“으아앙! 잘못했슴다, 쿠로콧치!”
키세가 전력으로 울상을 지으며 쿠로코에게 매달렸다. 조용히, 저들끼리 알아서 케이크를 나눠먹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쿠로코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죄인의 심정이 되어 훌쩍이는 키세에게 아카시가 조용히 케이크 조각을 건네주었다. 기술 좋게, 키세의 이름과 하트가 가운데 오도록 자른 조각이었다. 키세는 이 황송한 배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잔뜩 붉어진 얼굴로 카가미를 보았다.
카가미 역시 이 상황이 적응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들에게 숨기는 것도 힘들었지만 남들이 나서서 둘의 관계를 챙겨주는 것도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나. 카가미는 작게 한숨을 쉬고 키세를 베란다로 데리고 나갔다. 조용히 둘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시선이 차단되도록 커튼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겨우 둘만 있게 되어 긴장이 조금 풀린 키세가 죽는 소리를 냈다.
“뭔가, 예상하던 반응이랑 전혀 달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슴다.”
“그래도 다들 좋게 받아들여준 거 같아 다행이다, 그치?”
키세는 입을 꾹 다물고 크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지만 카가미는 그 침묵 속에, 숨길 수 없는 감격이 드리운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키세는 평소에 자신의 심정을 요란하다 싶을 정도로 떠들면서, 꼭 중요한 순간에는 그 감정을 침묵 속에 감추곤 했다. 아마 정확히는 이런 간지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매우 서툰 걸지도 몰랐다.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느낌으로.
키세는 자신을 향한 애정이 담겨 있는 케이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나 대신, 두 사람 불러줘서 고마워요, 카가밋치.”
“뭘.”
카가미는 머쓱한 투로 대답하며 키세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오늘 아침 이후로, 함께 재료를 준비하던 때 이후로 매우 간만에 접하는 서로의 존재와 온기였다. 이제 막 점심이 지났을 뿐이지만 어쩐지 꽤 오랫동안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스스로가 매우 어색해서 키세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두 사람 시간 때문에 점심으로 먹자고 한 거죠?”
“응. 돌아가는 시간도 있으니까.”
“헤헤, 카가밋치 너무 좋아.”
“알아. 나도 좋아해.”
처음엔 무척이나 낯부끄러워하더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쳐주기도 하고. 카가밋치 성장했슴다. 키세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슬쩍 그의 몸에 제 몸을 치댔다. 저와 키는 비슷하지만 근육 량이 차이나기 때문일까, 이렇게 카가미에게 기대면 어쩐지 매우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래서 결국 자신은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던 걸지도.
키세는 자연스럽게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카가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키가 비슷해서 고개를 들지 않아도 서로가 가까웠다. 서로의 숨결이 가까웠다.
서서히 뜨거워진 둘의 시선이 조용히 얽혀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가까워지려던 찰나, 옆에서 우당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키세와 카가미가 기겁을 하고 떨어졌다. 커튼으로 가려놓았는데도 그 가장자리에 자리한 눈동자들이 여럿이었다. 하도 몰려든 바람에 결국 베란다 창에 부딪쳐 들켜버린 일당들이 놀리는 듯한 휘파람을 불러댔다.
키세가 질겁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다들 큭큭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서 떨어진 때를 노린 것처럼 카가미가 재빠르게 키세의 팔을 당겨 끌었다.
자석처럼 자연스럽게 카가미를 향해 돌아간 키세의 얼굴에, 그 중에서도 입술에 찰나의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나머지는 이따, 밤에.”
그 작은 속삭임에 키세는 붉어진 얼굴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가미 역시 조금 붉어진 얼굴로 키세를 마주했다. 서로의 시선이 다시금 마주한 순간, 주변이 매우 고요해진 기분이었다. 카가미가, 키세가 좋아하는 아이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해, 키세. 태어나줘서, 나와 만나줘서 정말 고마워.”
키세는, 카가미가 좋아하는 그 반짝이는 미소로 조용히 화답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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